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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그레이스 Oct 18. 2021

디트리히 본회퍼

타인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18)

열두 번째 메시지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지난 몇 주에 걸쳐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으로 주일 설교를 해오면서, 저는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에는 이 말씀을 전하고자 작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능력과 구원승리를 믿는 개신교회는 그 큰 믿음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 갈 수 있고, 개신교회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변질의 위험에 맞설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살아 있는 믿음으로 살아내지 않는다면, 종교 개혁의 참뜻은 소멸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럽게 신앙을 고백하는 정통 믿음을 소유한 교회일지라도그러한 믿음 이상으로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타인을 미워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될까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러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위선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기에 앞서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란 불신자와 낯선 인종, 배척당하고 추방당한 사람들까지 모두 포괄합니다. 한 민족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돌이키고자 애쓰는 교회는그 민족 속으로 들어가 용광로같이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리하여 화해의 싹을 틔우고 사랑의 불을 지펴서 모든 미움을 잠재우며교만과 증오에 찬 사람들이 이제는 사랑의 사람들로 변화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종교개혁 이후로 교회에서는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신 말씀을 온전히 살아내지는 못했으며, 오늘 이 순간 이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박하게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그 누구도 그 어떤 교회도 자기 업적에 의지하여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일, 그리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그 일을 믿으며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채로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세상 각 민족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눈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교회는 필연코 이 세상의 권력의 손아귀에 빠져들어 고난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교회가 진실로 믿음의 교회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행하신 놀라운 일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골고다의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행하는 교회의 승리란 무엇이며,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의 삶이란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 는 진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오류를 직시하지만 진리를 믿고죄를 직시하지만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참된 믿음은 죽음을 직시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참된 믿음은 아무것도 안 보일지라도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     


개혁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개혁교회는 결코 자신이 행위나 사랑의 업적에 의지하여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합니다(요20:29 참조). 개혁교회는 환난과 역경을 직시하지만, 구원을 믿습니다. 개혁교회는 이단을 직시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믿습니다. 개혁교회는 복음에 대한 배도를 직시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개혁교회는 결코 눈에 보이는 거룩한 자들의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겉치레와 위선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죄인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이라는 칭송을 받고자 하는 자는 교회에서 나가라!” 죄인들의 교회은혜의 교회그것이 바로 믿음의 교회입니다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기에 그 믿음은 영원한 것입니다이러한 믿음 없이 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보는 것같이 믿는 믿음은 당연히 그 믿음대로 성취될 날을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배고픈 아이가 빵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아빠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을 듣는 사람이 순간의 불협화음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 확신하며 선율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처럼, 환자가 자신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으며 쓰디쓴 약을 삼키는 것처럼, 믿음은 소망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소망이 없는 믿음은 병든 것입니다이것은 배고픈 아이가 먹으려 하지 않고, 피곤한 사람이 잠을 자려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면 소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소망하는 것, 한없이 소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하나님을 보게 되리라는 소망 없이 그 누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 하겠습니까? 언젠가 영원한 평화와 사랑을 누리게 되리라는 소망 없이 그 누가 평화를 말하며 사랑을 말하려 하겠습니까?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보며 그러한 사람이 되리라는 믿음 없이 그 누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인류에 대해 말하려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우리는 소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 없음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겸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손을 뻗어 잡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절망감에 싸여 하나님의 영원한 권세와 영광을 바라며 기뻐할 수 없는 초라하고 소망 없는 모습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를 소망이라 부른다!” “소망은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 않습니다.”(롬5:4 참조). 원대한 소망을 품은 사람은 그 소망과 함께 위대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품은 소망과 함께 자랍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유일한 권세에 소망을 둘 때, 사람은 자신이 품은 소망과 더불어 자라게 됩니다. 소망은 영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앞에 전개되었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내가...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모든 소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온 인생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인생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창17:1).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요일4:16).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겸손한 믿음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하나님의 실재를 간절히 소망하며 확신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며하나님의 사랑은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을 알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음을 소망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확실히 붙드는 믿음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매 순간 본향을 바라보며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를 기다리는 소망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타인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심지어 형제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구원조차도 내어 주는 섬김의 사랑입니다주님을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마저도 희생하는 자는 결국 사랑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0:39 참조).     


믿음과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전류가 끊어진 전선과 같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없이도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말씀 위에 우리의 개신교회가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유일한 답을 찾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대답은 바로 “당신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는 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사랑을 가지고 모든 선한 일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사랑으로 완전해집니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의 형상으로 변형되어 영원으로 들어갑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사랑의 형상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이 세상에서 완성된 사랑의 표적은 십자가입니다완전한 사랑이 이 세상에서 걸어가야 하는 길항상 새롭게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세상은 때가 차서 붕괴 직전에 있지만 오직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인내로 끝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이 세상의 교회는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모두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이제 우리가 교회 문 밖으로 나가면, 이곳 교회에서 우리가 말한 것을 그저 말이 아니라 실제로 보기 간절히 원하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수천 번 속임 당하고 실망에 빠진 인류가 믿음을 원하고상처투성이로 고난 받는 인류가 소망을 원하며다툼과 불신에 빠진 인류가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은 그렇게 가련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가련한 인류를 보며 마음 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인류가 우리로 인해 새롭게 믿음을 갖고 소망하며 사랑하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종교개혁의 날에 소리 높여 외쳐 봅시다. 믿음으로 소망하며그 무엇보다 사랑합시다그러면 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요일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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