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언어 모두 잘 읽고 잘 쓰려면? ( 6살 반 )
반 아이들의 50프로를 결석하게 만든 강력한 인플루엔자였다. 감기 한번 앓은 적 없는 이안이도 이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고열에 아이는 맥을 못 추고 널브러졌다. 일주일 가까이 등교를 못 하는데 반해 아이의 학부모 단톡 방은 쉴틈이 없이 울렸다. 아이들의 하교시간이 되면 인플루엔자의 공격에 살아남아 등교한 아이들의 엄마들이 그날 하루 수업한 내용과 숙제를 업데이트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지 반년이 지나서야 난 아이의 숙제를 진지하게 들여보게 된 거다.
반년 간 보아온 이탈리아 교육은 더디고 더디고 더디다. 과연 이 속도라면 일 학년을 마치기 전에 알파벳은 다 땔 수 있는 것인가? 일 학년 과정이 숫자 20까지라는데 반년이 지나도록 아직 10을 배우지 않은 것 같다. 하향평준화. 제일 못하는 애가 평균인 나라. 이러니 애들이 경쟁심도 없고 욕망도 없고 그 자리에 다 만족하고 사는 거야. 이탈리아 공교육에 나의 아이의 미래를 맡길 수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반년만에 진지하게 마주한 교과서는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책의 지문은 꽤 수준이 높았다. 그제야 오래전 흘려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저학년에는 아주 천천히 기초를 다지지만 어느 순간 속도도 수준도 아주 높아져버린다고. 그래서 중학교 때가 되면 될 놈만 따라가고 그 애들만 끌어가는 구조라고. 하향평준화인 줄 알았더니 어느 순간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로 돌변해 있었다.
책 한 페이지에 있는 단락을 6번 읽는 숙제가 있어 아이가 읽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단어도 몇 개나 나왔다. 다 읽은 아이에게 이 단어는 뜻이 뭐야? 물으니 모른다. 이건? 모른다. 물론, 나도 모른다. 아이와 함께 앉아 이탈리아어 사전을 펼치고 이건 이런 뜻 이래. 마리를 맞대고 하나하나 되짚어 나갔다.
아이는 이탈리아 말을 잘한다. 한국말도 잘한다. 하지만 두 언어 모두 불안정하다. 이탈리아 말은 학교에서만 듣고, 한국말은 집에서만 듣는다. 예전 글에도 썼지만 말은 본능이다. 살면 수준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말은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수준이 어느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는 노력과 교육의 결과다.
이탈리어에서 자란 한인 2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탈리아 말은 당연하고 한국말도 유창했다.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종종 가지는 어눌한 발음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들 대부분 한국말로 읽고 쓰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한자어 단어나 사자성어는 낯설어했다.
아이의 숙제를 보면서 그 대화가 떠올랐던 것은 아이의 이탈리아 말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말은 잘하지만 학교에서가 아이가 만나는 대부분의 이탈리아어이다 보니 어휘면에서 또래보다 부족하다.
이중언어의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것이 있다. 전혀 다른 두 언어가 정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초등학교에 입학 전 아이는 이미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었다. 자음 모음. 하지만 아이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했다.
이탈리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이렇게 느려서 언제 읽고 쓰나 할 만큼 지지부진한 수업이 진행됐다. 아주 공을 들여 알파벳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연습을 했다. 자음과 모음이 만나서 만드는 음절 하나하나를 끊고 구분하고 읽는 훈련이 매일매일 이어졌다.
그때부터였다.
아이가 한글을 스스로 읽기 시작한 것이. 이탈리아어로 자음 모음의 원리를 알고 훈련이 되자 자연스럽게 한글이 아이 눈에 들어와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언어에 개념이 잡히자 또 다른 언어가 따라 성장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언어가 다른 언어로 흘러들어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었다. 어느 언어든 하나가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그러나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두 언어 모두 불안정하다면 물은 어디로도 흐르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말라버린다는 이야기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두 언어 모두 2% 부족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부모와 학교에서도 완벽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나가야 할까?
답은?
독서다.
문제는 독서가 가장 심플한 해결책 같아 보이지만 가장 골 때리는 답이기도 하다는 거다.
책상에 책을 들고 애를 앉혀놓을 수는 있으나 결국은 애가 스스로 읽어만 한다.
물가에 데려다는 놓았다. 자, 어떻게 물을 마시게 할 것인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심지어 물을 두 군데에서 마시게 해야 한다. 한국 책 이탈리아 책 모두 읽게 해야 한다.
그 답을 치마만다 응고치 아다치에의 [엄마는 페미니스트] 2017, 민음사 에서 발견했다.
다섯 번째 제안
독서를 가르칠 것
책은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의문을 품도록, 자기표현을 하도록,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이든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줄 거야. 요리사든, 과학자든, 가수든 독서를 통해 배운 기술은 누구에게나 도움이 돼. 교과서를 말하는 게 아니야. 학교와 전혀 관계없는 책, 자서전, 소설책, 역사책을 말하는 거야. 혹시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한다면 책을 읽을 때마다 돈을 줘. 상을 주는 거지. 내가 아는 사람 줄에 앤절라라고, 홀몸으로 미국에서 자식을 키운 대단한 나이지리아 여자가 있는데, 딸애가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길래 한쪽 읽을 때마다 5센트씩 주기로 했대. 나중에 농담하길, 참 값비싼 노력이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투자였다더라. 44p
때마침 아이가 장난감 현미경이 가지고 싶다고 했다.
_엄마가 현미경을 사줄게. 단, 조건이 있어. 책 한 권을 네가 스스로 읽어야 해. 다 읽고 한국어 이탈리어어로 독후감상문을 써 오면 그날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상에 현미경이 있을 거야.
_오케이
첫 단추는 채워졌다.
다음 단계는 책 고르기
아이가 읽어주길 바라는 엄마가 고른 책이 있다. 아이의 수준에 맞다고 생각해 엄마가 골라본 책도 있다.
여러분의 예상대로 둘 다 답이 아니다.
엄마가 원한 책은 아이가 관심이 없다. 이이의 수준에 맞다고 생각한 책은 아이 수준보다 높았다.
첫 책이 중요하다. 재미가 없거나 어려우면 아이는 현미경이고 뭐고 안 가지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책 읽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이유는 현미경일지라도 막상 읽게 되었을 때 재미있다고 느껴야지만 다음 독서로 무리 없이 연결될 것이다.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고 금요일 밤 아이와 외출을 했다. 작은 공연이 열리는 북카페에서 아이와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이가 스스로 책을 고르도록 유도했다. 내가 생각해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남들을 웃겨주길 좋아하는 드래곤 이야기다. 99센트의 (1000원 정도, 가격도 어쩜 이토록 착해?! ) 얇은 문고본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이는 크게 소리 내어 있고, 떠듬떠듬 이탈리아 말로 한국말로 짧은 독후 감상문을 완성했다. 다음날 아이의 품에는 현미경이 안겨있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아이와 하나의 약속을 다 만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 놓자마자 티브이를 보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제안했다.
원하는 만큼 티브이를 보게 해 줄게.
단, 조건이 있어.
한국 책 이탈리아 책
한 페이지씩 읽기
책 읽기의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였나. 첫 책을 읽을 때 불편함이 없었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던 거다. 아이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날 이후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리모컨이 어디 있냐고 묻던 아이는 “오늘은 뭘 읽어?” 라고 묻기 시작했다.
오빠가 책을 들자 동생도 따라 앉았다.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애들도 따라 읽는다는 말은 내 육아 경험상은 전. 혀. 소용이 없었다. 엄마가 책을 읽으면 애들이 와서 책을 뺏는다.
심지어 첫째는 내가 책을 읽으면 차라리 휴대폰을 보라고 했다. 휴대폰은 보다가도 아이가 부르면 바로 멈추는데 책은 읽고 있으면 아이가 부르면 잠깐만 여기까지만 읽고 하며 즉각적인 반응이 없다는 게 아이의 설명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즉시 상호 반응을 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남매다. 오빠가 책을 읽으니 동생도 오빠 곁에 앉는다. 단순히 소리를 내는 식으로 내용의 이해가 없이 책을 읽던 아이가 읽기와 동시에 독해가 가능해지자 동생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직 이탈리아 말이 서툰 동생을 위해 이탈리아 책을 한국말로 번역까지 시도한다.
아이가 소리 내어 읽으면 대부분 틀린 발음으로 읽는다. 난 옆에 앉아 그건 이렇게라고 수정해 준다. 엄마 입장에선 교정해주는 거고 아이 입장에선 지적질이다.
미국에선 read to dog 이라는 읽기 방법이 있단다. 도서관에 개가 있는 거다. 애들은 개에게 책을 읽어준다. 놀라운 건 아이들에게 한 두 페이지를 읽으라고 했음에도 개에게 읽어주다 보면 한 권을 다 읽어준단다.
이유는 개는 지적질을 안 해서.
동생에게 책을 읽어 주는 첫째 역시 한 권을 뚝딱 읽기도 한다. 동생은 리엑션도 좋고 당연히 지적질을 안 한다. (심지어 자신을 개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한 번은 아이의 한글학교 숙제를 봐주다 남편과 바통터치를 했다. 남편은 아이가 혼자 모든 문장을 완성할 때까지 가만히 곁에 앉아 있었다. 숙제를 다 마치고 아이는 스스로 읽고 스스로 고쳤다. 남편은 딱 한마디만 했다.
이제 이안이가 쓴 걸 한번 읽어볼래?
함께 책을 읽고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비로소 엄마는 두 언어의 독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깨닫는다. 이중언어의 불완전성의 보완 그 이상의 의미를.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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