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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6세, 이중언어중간보고

초등학교 공식 개인면담 주간

by 로마 김작가

처음 이안이의 이중언어에 대해 글을 쓴 건 이안이가 만 두 살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아이의 작은 입에선 이탈리아 말만 나왔다. 어버버 이탈리아 말을 하던 한국 엄마는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탈리아 말을 거침없이 하게 될 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자신도 없었다. 내가 이탈리아 말을 하는 것보다 얘가 한국말을 하는 게 훨씬 실현 가능해 보였다.


두 살이 지나 휴가로 머물었던 한국에서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국말만 했다. 그런데 로마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입을 다물었다. 생애 처음 이탈리아 말을 들어본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선 눈만 멀뚱멀뚱. 급기야 1년 넘게 다닌 어린이 집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몇 달이 지나서야 아이의 입에서 다시 이탈리아 말이 나왔다.


그렇게 그 누구보다 여기 생활에서 잘 적응했던 아이였음에도 한국 휴가만 다녀오면 버퍼링이 걸려버렸다. 한국에선 단 한 번도 버퍼링이 없었으니 (적어도 그때엔) 아이의 가슴속 언어는 한국말이었을 거다.


처음 한국 휴가 이후 이탈리아 말을 다시 찾기까지 두 달이, 두 번째는 한 달 반, 세 번째 한국행 이후엔 이탈리아 말을 잃어버렸노라 떼를 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서야 말을 찾았노라 고백했다.


숨어버린 말을 찾는 시간은 점차 짧아졌지만,
되돌아오기까지는 어김없이 예열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탈리아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한국말이 목마른 아이처럼 한국 콘텐츠만 요구하고 한국에서 사 온 로봇 장난감만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불과 작년 봄까지도 공존하던 두 언어의 혼란이 여름이 지나며 급격하게 옅어졌다.


한국에서 짊어지고 온 로봇 박스에 먼지가 쌓여갈 무렵 아이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축구선수들의 얼굴이 찍힌 카드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의 그림은 공룡과 로봇이 아닌 반 친구들이 채워졌다. 한사코 거부했던 축구학교에 스스로 들어갔고 작년 11월 한국 휴가에선 이탈리아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한국 휴가를 끝내고 학교에 돌아온 날, 교실 안에서 들리던 환호성과 함께 아이는 마치 어제도 로마에 있었는 듯 이탈리아 말 쏟아냈다.


지지지이익 불을 붙이기 위해 몇 번이나 레버를 돌리고 눌러 야만 하던 가스레인지가 터치만 하면 불이 탁! 들어오는 최신식 인덕션이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이안” 이라는 발음은 쉽지않다. 대부분 이안느 ,라고 발음한다. 이제 아이는 누군가 “이안느~” 라고 부르기만 해도 언어가 바뀌는 자동변환 센서를 탑재했다.

지난 주, 초등학생이 되고 반년이 되어 (벌써 반년이라니!!) 선생들과의 공식 개인면담이 있었다. 스페인어 지도 겸 교장, 영어 선생님, 그리고 담임과 면담을 진했다.

교장: 이안이는 활기차요. 말도 많아요. 장난도 많이 치고요. 하지만 이야기하면 바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요. 다른 언어에 대한 거부감이나 말을 함에 거침이 없어요. 이안이는 한국말로 쓰고 읽는 것이 더 편하겠지만 집에서 이탈리아 말로도 많이 훈련시켜주세요. 네?! 말은 한국말을 편하게 생각하는데 읽고 씀은 이탈리아 말을 더 편하게 생각해요? 흥미롭네요. 네? 책도 써요? 저도 보고 싶네요. 담임 면담 때는 꼭 그걸 가져가서 보여주세요.

말은 본능이다. 그러나 읽고 쓰는 것은 교육이다. 아이는 이탈리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시간이 월등히 많다 보니 말과 별개로 이탈리아어로 쓰는 읽는 게 더 편하다.
말은 한국말, 읽고 쓰는 건 이탈리아 말 이 더 편해요. 이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영어 선생님 : 이안이는 활기차요. 말이 많아요. 이미 귀가 열려있음이 보여요. 또래의 아이들은 단어를 기억하지만 맞고 틀리고를 떠나 바로 문장에 집어넣어요. 이건 일반 아이들에겐 쉽지 않아요. 두 언어를 쓰면서 무의식 중에 훈련이 된 거예요. 우린 글을 쓰고 읽고의 수업은 아직 하지 않으려 해요. 올해는 무조건 많이 들려줄 거예요.

이안의 그림과 글을 파일에 넣어 면담시간에 가져갔다.

마지막 담임의 면담을 앞두고 이안이의 그림과 글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 책도 함께 가져갔다. 담임에게 묻기 위해 가장 궁금한 질문 하나를 남겨두었다. 언제나 뇌리를 떠나지 않던 질문.


과연 한국말만큼 이탈리아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또래만큼의 이탈리아 말을 구사하고 있을까?


담임 : 이안이는 활기차요. 그리고 말이 많아요. 정말 부탁인데 수업시간에 조금만 말을 줄이라고 이야기해주세요. 솔직하게 이안이의 이탈리아 말은 반 애들보다 더 나아요. 이해력이 좋아요. 네? 이안이가 이야기를 써요?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렸다. 아주 꼼꼼하게 그림 하나하나 글 하나하나 읽었다. 그리고 나의 책도 보여드렸다.) 꼭 이탈리아 말로 번역해야 해요. 약속해요.

며칠 뒤, 보란 듯이 학교에서 경고를 받아온 이안.

“이안이는 수업시간에 계속 떠들고 친구들을 부릅니다. 부모 사인받아오세요.”

본능적으로 언어를 하던 아이는 교육으로 이탈리아 말을 만나며 정비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또래끼리는 말이 많아도 어른을 만나면 단답만 하던 아이가 길 가다 스치는 사람에게도 수다스럽다. 안 그래도 말 많은 아이가 폭주했다. 축구학교에선 3군, 아니 열외 그룹이던 아이는 이번 주 2그룹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 6살,
아이의 모든 세포가 들썩 거린다.


말은 참 많지만, 두 언어의 아이에겐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좋게 해석하련다. 어쨌든, 이안이의 이중언어중간보고는 맑음.




그리고 우리의 둘째, 12월 만 3세가 되는 그녀는 거의 이탈리아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유치원의 귀띔이 있었다. 다음 주는 그녀의 유치원 공식 개인면담 주간이다. 다음 편은 만 3세, 그녀의 이중언어 첫 보고가 되겠다.


난 얘도 당연히 오빠처럼 척척 말이 나올 줄 알았지. 이탈리아 말은 무슨! 한국말도 시원찮다. 아이고, 아이들은 다 다르다 해도 남의 일인 줄 알았지.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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