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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Apr 29. 2020

네가 물어보지 않으면 네가 모른단 걸 아무도 몰라

그건 분명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스카이, 스카이!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실 날이었다. 분명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나의 시야에 스카이가 들어왔다.


저 멀리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모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아이들 모습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스카이는 작년에 이안이 유치원으로 전학 온 중국 아이다. 




로마에서 태어난 나의 첫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기나긴 여름방학 동안 엉망진창이 된 기상시간인데 당장 8시까지 등교를 해야 한다.


유치원 9시 등교도 두 아이를 챙겨 나가면 지각이 일상이었는데 놀랍게도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이안이도 진작에 기상했다. 방으로 들어와 여전히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엄마 긴장돼”

긴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뿐 아이의 눈에는 흥분과 설렘이 가득했다. 작은 등에 버거워보이는 책가방을 매고 같이 유치원에 입학한 동생의 두 손을 꼭 잡고 훈수를 둔다.

“이도 선생님 말 잘 듣고, 엄마가 간식에 초콜릿을 넣었어. 꼭 먹어야 해. 오늘은 울면 안 돼”

여름내 그리워한 친구들을 만났고 아이들 못지않게 구릿빛으로 그을린 부모들과 이탈리아 특유의 오버스러운 재회를 했다. 입학식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광장에 모여 학년마다 줄을 섰고 교장의 인사말도 따로 없었다.


원장 수녀님이 앞으로 나와 다 함께 성모송(기도문)을 외우고 최고학년의 이름을 불렀다.  곧이어 신입생의 이름을 불렀다. 선배가 후배의 손을 잡고 반으로 안내했다. 마치 그리핀도르~ 하고 부를 것만 같아 해리포터야... 감성에 젖어 있었다.


스카이의 차례였다. 답은 없었다. 멀리 불안해 보이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저 동양 아이가 내 아이 같았다.

담임에게 다가가 저기 스카이가 있어요.라고 전했다. 행사로 정신없는 선생이 그럼 데리고 오세요. 하고 답했다. 선생이 아이고 어째 하며 한걸음에 달려가 직접 아이를 데리러 갈 거라고 기대한 나는 당황했다.


“제가 스카이의 엄마는 아니고요...”


흔들리는 나와 스카이의 보모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선생에게 다가가 스카이가 저기 있어요. 라고 말했다.


더듬더듬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이탈리아 말이었다.

분명 이탈리아 말이었다.

다만 완벽한 중국어 발음과 억양이었다.


담임이 답했다.


미안하지만 중국말을 할 줄 몰라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뭐가 나의 마음을 내려앉게 한 걸까?

아이들 모두 교실로 올라가고 부모들이 뒤따라 올라갔다. 3층의 교실로 올라가는데 계단 아래부터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런 울음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복도에서 스카이가 울고 있었다.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나의 아이보다는 머리가 하나 더 큰 아이의 울음은 떼를 쓰는 아이의 울음이 아니라 절벽 끝에 몰린 이의 절규 같았다. 교장이 달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끝내 교실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새 교실은 분홍색 벽으로 칠해져 었다. 설렘 가득한 아이, 긴장한 아이, 낯 섬에 입을 닫은 아이, 설치는 아이, 감격해 우는 엄마, 걱정스러운 눈빛의 엄마, 아이에게 축하와 용기를 건네는 아빠.


스카이를 제외한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입학식의 풍경이었다.

그날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선생, 스카이, 초등학생, 많은 단어들이 맴돌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뭔지 모르게 냉정해졌다고 느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서 스카이 엄마를 만났다. 바쁜 사업으로 좀처럼 학교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비싼 사립학교를 나왔고 큰 사업을 한다.  그럼에도 편하게 말을 거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안으며 어제 스카이를 보고 마음 좋지 않았노라 고백했다. 입학식에 엄마가 안 와서 그랬던 거냐? 하니 작년에 학교를 옮기고 겨우 적응했는데 일 년 만에 반이 바뀌고 선생도 바뀌니 당황했던 거 같다고 답했다. 사업이 바빠 아이에게 제대로 그런 설명도 안 해줬다고.


긴 방학이 지나고 안 그래도 어색한 아이가 익숙해진 반, 담임이 달라져 있으니 두려웠을 법도 하다.

오후에 아이들 픽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담임과 마주쳤다. 아이가 잘하고 있냐? 애가 한국 앤 데 부모도 한국인이고 조금 부족할 수도 있을 텐데 신경 써 달라고, 하고픈 말이 많았다. 인사를 마치고 그 말들을 쏟아내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단호하고 간결하게.


우린 지금 알아가는 중입니다.


그 순간 무거웠던 마음의 이유와 마주했다.


이탈리아는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동을 이해해준다. 식당에서 떠들어 양해를 구하면 앤 데 당연해, 난 저때 더 했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처음 보는 이들도 아이라는 이유로 사랑이 담긴 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되는 순간 아이를 어른으로 대우해 주는 것 같다. 존중받는 거다. 그런데 이 존중은 그만큼 성숙해져야 함의 대가인 걸까?


유치원이었다면 담임은 달려가 아이를 달래고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입학식을 진행했을 거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자신의 걸음으로 무리로 들어와야만 하는 거다.


이안이는 한국인, 스카이는 중국인이지만  여기서 태어나 자라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부족할 수 있다는 배려의 기간이 종료된 거다. 적응 기간은 유치원에서 끝을 내고 동등하게 존중받는 세계로 진입한 거다.


담임은 나의 정보가 아니라 교실에서 스스로 부대끼며 아이를 알아가겠다 선을 그었다. 부모가 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보여주어야만 하는  세계다. 저 안의 세상은 아이의 몫이다.

이탈리아의 초등학교는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혹여 아이가 나에게 답을 구한다 해도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없을 거다. 아이는 저 안에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같은 세상 속의 친구들 어른들에게서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스스로.

저들의 세계로 아이는 더욱 깊숙이 들어섰다. 이 모든 변화를 설렘으로 느껴주는 아이에게 고맙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 때가 오면 분명 저 아이가 나 대신 동생의 이끌어줄 거다.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먼저 부딪쳐 얻어낸 값진 지혜를 동생에게 이어 줄 거다.


그 역할을 내가 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의 영역이 아니다.

깨달았다.

스카이의 울음 앞에 나도 울고 있던 이유를.

울고 있는 중국 소년에게서 본건 내 아이가 아니었다.


나였다.


겨우 적응하고 익숙해진 환경에서 다시 적응하려 헤매는 나였다. 레벨이 올랐으니 당연히 더 복잡해졌고 다음 레벨로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내가 한국인 엄마라는 이유로 배려받기엔 적지 않은 적응의 시간이 있었으니, 학부모들에게 학교에게 이탈리아에게 배려를 요구할 명분은 없다.


잘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남들 하는 만큼 따라가기가 이토록 버겁고 똥줄이 탈 일이다.

막막하고 두려운데 심지어 아무런 준비도 설명도 없었다. 게다가 기댈 엄마 조차 없던 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난 소리 내어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학을 즐기고 있는 자식의 눈을 피해 어미가 되어가지고 부담감에 마음이 내려앉았고 있었던 거다.


엄마의 타들어가는 속은 알리가 없지. 마냥 설레여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사랑한다 대견하다 축하를 건네는 부모들 사이에서 아이에게 당부했다.


모르면 물어봐.
무조건 물어봐야 해.
네가 물어보지 않으면 네가 모른단 걸 아무도 몰라.
그리고 모르는 게 당연한 거야.
알지? 모르면 물어봐.
무조건 물어봐야 해.


눈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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