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절

여름

by 로마 김작가


12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절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극 중 그녀의 이탈리아 친구들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말로 가르쳐주는 문장


Non fa niente.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 말을 듣고 누군가는 노자의 무위[無爲 ]와 같은 말이냐 물었습니다.


무위[無爲 ]

: 자연스러움, 인식의 오류로 말미암아 혼란해진 자기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방법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 에선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산만하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는다. 그 생각들이 자신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데도 말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일본의 선승 데이시루 타이센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하늘의 구름처럼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존재해야 한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생각과 말을 아끼고 심장박동과 호흡 같은 생명이 내는 모든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가끔은 정신이 내면을 향하면서 조용히 쉴 수 있도록 그저 ‘존재하는’ 시간을 갖자.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은 말을 아낄 줄 모르고 철학적으로 삶을 살아내는 이들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삶을 얼마나 풍족하게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이런 마인드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걱정이됩니다. 마치 전 국민이 약속이나 한 듯 8월을 통째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세상은 돌아가니까요. 하루만 인스타를 하지 않아도 피드는 확인이 불가능할 만큼 넘어가 버리고 세상은 갖가지 이슈로 넘쳐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매년 여름만큼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탈리아의 경기가 나빠지는 소식을 듣게 되면 이런 삶의 방식으로는 경기가 좋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언젠가 이들도 삶의 방식을 바꿔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말 거라고 단언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여름의 휴가지에서 만나는 이탈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3대가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고, 그렇게 그저 자연과 함께 존재하고 가족이 온전히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낸 그들은 세상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진다 해도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속도라고 무시해버리고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듯 자신들만의 속도로 여름을 살아갈 거라고요.


이들의 삶을 누군가는 게으르다고, 안일하다고 말할 수 있고 누군가는 부럽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고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시대를 맞이하며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오래 깊게 강하게 남는 것은 모든 것을 멈추고 가족이 누렸던 빛나는 여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음의 여름을 기약하며 지금의 여름을 미루다가 자칫 그 계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해 버렸습니다. 올해 우리가 잃은 봄처럼 말입니다.


우린 코로나 이후의 첫여름을 맞이 합니다. 평생 지켜온 여름의 시간을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 모습이 작년과 크게 변했다 해도 이들은 여름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누리려 합니다.


친구의 시댁은 이탈리아 해변에 작은 여름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8월은 밀라노의 한 가족이 10년째 이 곳을 렌트해 한 달을 머뭅니다. 그런데 올해는 단 며칠을 머물기에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 예약을 할 수 없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친구의 시아버지는 10년간 오던 여름을 포기하지 말라며 무료로 여름 집을 렌트해 주셨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에게 여름이 얼마나 소중한 계절인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이 여름이 우리 생에 얼마나 큰 응원과 위안을 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이러니하게 우리 가족은 코로나로 인해 강제 휴직 중이라 이탈리아에서 가정을 꾸린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이 모두 함께 온전히 여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돈도 마음도 여유도 없지만 아이 친구의 할버지댁이 있는 산에서 친구 시댁에 있는 수영장에서 호수에서 바다에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의 배려로 여름을 잃지 않고 붙잡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사랑한 바다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우리들의 바다를 떠올리며 행복에 젖어봅니다.






Anzio


:유적에서 썬텐을!


로마에서 차로 1시간 달려 도착한 해안마을입니다. 네로 황제의 여름 별장 유적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에 온 첫해에 이탈리아 친구 아버지가 차로 데리고 가주었던 이 바다에서 보았던 광경은 무척 충격적이었습니다. 해변을 내려다보자 기대했던 해변이 아니라 유적지가 보였고 바다와 맞닿은 유적지 위에 누워 썬텐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단 한 번도 유적지 위에 누워 썬텐을 해도 된다고 배워 본 적이 없었기에 눈앞의 풍경은 비현실을 넘은 초현실이었습니다. 몇 년 후 이 해변에서 아들은 처음으로 홀로 걷기 시작합니다.



바다에는 초등학생 나이 정도의 아이들이 누워 태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모습은 생의 시작부터 여름을 즐겨본 연륜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게 놀던 아이들은 점심때가 되자 처마에 젖은 수건을 널고서는 모래로 가득한 캐비닛을 알아서 청소를 했습니다.



점심은 이탈리아 친구가 추천해 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식당

레스토랑 Al Turcotto - (Riviera vittoriomallozzi 44, Anzio)으로 정했습니다.


Pesce Crudo(신선한 해물: 이탈리아에도 회가 있습니다! 올리브유가 뿌려진 생선과 굴 그리고 새우 등이 나옵니다.)
해물 파스타(Taglioloni alla “Grottarola”: 가는 탈리아텔레면의 해물파스타)
오렌지 크림소스의 파스타(Ricci gamberi e arancia: 리치 면의 새우가 들어간 오렌지 크림소스 파스타



Salento


: 생애 최고의 바다


살렌토는 아직 한국에선 생소한 지역입니다.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의 뒤꿈치로 동쪽으로는 아드리아해 남쪽과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가 펼쳐지죠. 로마에서 차로 7시간가량 소요됩니다. 우린 새벽 2시 즉흥적으로 살렌토로 향했습니다. 한국 비행시간보다도 훨씬 긴 왕복 14시간을 감수하고 달려간 바다. 그 바다는 긴 시간을 달려온 우리의 고생을 황홀로 보답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던 Torre s.Andrea의 절벽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소년들
눈부시도록 맑던 Torre dell’Orso의 바다


로마로 돌아오던 날 마지막 여정이었던 Lecce 마지막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식당을 찾는 철칙이 있습니다.


식당을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난 현지인에게 물어라.
그 현지인은 40대가 넘은 동네 아저씨들이 가장 좋다.
만약 동네 아저씨를 못 만났다면 담배가게 청년들을 믿으라.


이렇게 찾아낸 식당은 절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추천을 받아 찾아간 식당은 번화한 관광지에서 조금 벗어난 한산한 뒷골목에 있었습니다. 바람이 관통하여 유난히 시원하던 골목길, 그런데 주방은 보이는데 자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하는 우리에게 주방장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킵니다.



골목길의 한 귀퉁이 큰 나무가 지붕이 되어주는 야외 식당 l’Arte deisapori- (vico derli alami 3, Lecce)입니다.



요리가 완성되면 창문으로 주방장 아저씨가 크게 소리칩니다. 서빙해!!!

전식은 일명 다섯 접시 모둠, 모든 음식이 맛있었지만 홍합구이는 일품이었습니다.


spaghetti alla bottarga di muggine e vongole : 말린 숭어알과 조갯살이 들어간 스파게티
Trofie con ricotta, melanzane e pomodorini : 트로피 면의 리코타 치즈, 가지 그리고 작은 토마토가 들어간 파스타



지칠 때마다 충전을 해주었던 이탈리아의 바다와 요리들, 이 여름을 보내며 새삼 이 멋진 곳들을 마음먹으면 달려갈 수 있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이 순간들을 함께하고 느끼고 추억하는 가족이 곁에 있음에 행복합니다. 우리의 뜨거운 여름날을 보내며 ‘쉼’은 뒤처짐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온전하게 소유한 하루였음을 깨닫습니다.



몸에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에는 생각이 필요하고 마음에는 기쁨이 필요하다.
샴페인을 즐길 줄 아는 삶을 살자.
새로운 철학을 공부하는데 시간을 낼 줄 아는 삶을 살자.
우리는 타고난 본능이 정상적으로 충족될 때만 행복해질 수 있다.
낮과 밤, 계절에 따라 박자를 맞추며 우리 앞에 주어진 길을
즐겁게 걸어가면서 하루하루를 살자.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을 사랑하자.
잘 사는 방법은 삶을 즐기는 것이다.

– 심플하게 산다( 도미니크 로로)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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