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가 올해일 줄 몰랐지
유치원에 도착했다. 개학이다. 반년만이다. 그런데 우리 밖에 없다. 깨끗하게 빨아 빳빳하게 다린 샛노란 원복을 입고 새 빨간 실내화 주머니를 든 아이. 그런데 다른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소풍날 혼자 학교 가기, 방학했는데 모르고 학교 가기, 이런 건 만화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황당한 악몽 아닌가? 이게 뭔 일이지? 경비원 아저씨가 다가왔다. 교복 주문하러 온 거야? 아닌데? 오늘 개학이잖아. 그런데 왜 아무도 안 보여? 무슨 소리야? 개학은 내일이잖아.
학교 공문을 다시 확인하니 개학이 내일이다. 유치원 개학날이라고 네 가족이 총출동했다. 늦을까 봐 신호등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는데 학교 가기 싫다는 애를 아침부터 얼마나 구슬렸는데 내일이라니. 짜증을 내는 아들과 남편 앞에서 버럭 화를 냈다. 다들 학교 공문 한번 들여다본 적 없으면서!!! 얼마나 많은 공지사항이 하루에도 몇 건씩 올라오고 바뀌는 줄 알아?!
왜 나 혼자 이걸 다 해야 해?!
아무도 없는 학교 정원에 우리가 서있었다. 아이들 남편 세명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네가 다 잘해 왔잖아요. 스스로 척척 일을 잘해 나간다고 자신만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나를 의지하는 저 눈빛들이 싫다.
개학을 앞두고 우리가 주도하던 시간이 멈추고 다시 이탈리아 현실의 시간을 살아나가야 하는 때가 왔다. 기다리던 시간이지만 언제나 살아냄은 좀 버겁다. 어쩌다보니 올해는 체류 행정 가계 교육 학교 이탈리아 삶의 모든 부분을 내가 책임져야 하게되었다. 막상 이 시간이 코앞에 닥치니 숨이 막혀왔다. 이탈리아 삶의 대부분의 문제를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야한다는 것은 아무리 살아온 시간이 쌓여도 무겁고 무섭다. 모든 문제를 부딪혀 해결했었다. 그런데 비대면으로 정보를 받아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적응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 나 혼자라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언택트인데...
코로나로 시간이 멈추고 반년 간 힘겨웠지만 단 하나 시간을 우리가 주도할 수 있음이 좋았다. 텅 빈 시간을 우리가 짜면 됐다. 해결할 일은 생계뿐이었다. 물론, 이게 제일 큰 문제 같지만 행정부터 학교 문제까지는 멈춰있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는 적었다.
그런데 정지되었던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은행 행정 학교.... 그중에 학교. 코로나 이후 죄다 바뀌었다. 뭔 규칙은 하루에도 수십 번도 바뀌고 말 많은 만큼 문서도 길고 준비할 서류도 준비물도 넘쳐난다. 이해를 못하는 건 와국인인 나만이 아니었다. 학부모 단톡 방은 질문으로 폭발했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 매의 눈을 하고 확인했는데, 아뿔싸 개학날을 착각하다니!!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끈 하나가 툭 하고 끊어졌다. 끈 하나가 끊어졌을 뿐인데 댐이 무너진 듯 불안과 조급함이 물밀듯 쏟아졌다. 원망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 남편에게 향했다.
왜 나만 이렇게 동동거려야 해?
3월부터 그는 무기한 휴직 상태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주일에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 투어로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잘 나가는 가이드였다. 그런데 코로나가 선물한 달갑지 않은 휴가 중에 그는 잘 나가는 가이드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연예인들이 현실에 나와보니 인터넷 뱅킹 하나 할 줄 몰랐다더니 그가 그랬다. 20년 가까이 가이드만 했다. 결혼하고 부모가 되고부터는 돈을 버는 일 외 모든 일처리는 내가 했다. 그의 밥벌이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이탈리아에서 걱정 없이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았다. 그런 그가 기약 없는 휴직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 몰라 허우적거렸다. 난 놀부의 아내가 되어 잔뜩 심통을 입에 물고 상처 받을 말을 쏟아냈다. 그는 자꾸만 위축되고 눈치를 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놀부의 아내는 더 눈을 흘긴다.
이런 일이 또 있었다.
분명 있었다.
직장을 잃고 총기를 잃은 눈빛과 힘 빠진 어깨의 남자. 못된 말로 쏘아붙이던 나. 20년 전 IMF로 직장을 잃은 아빠와 대학 초년생의 나. 생각해보니 그때 아빠의 나이가 지금 남편과 비슷했다.
남자의 나이가 50에 들어선 땐 무조건 이런 위기가 오는 건가?
남자의 백 년이 꺾일 땐 삶이 휘청거리는 걸까?
주저앉은 아빠를 보며 왜 나가서 돈을 벌려고 애쓰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면 일자리 잃고 가장들이 주유소도 나가고 경비원도 하던데 과거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을 허덕이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생 가정주부였던 엄마, 군대 간 오빠, 집에서 현실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대학 동기들이 매일 밤 부어라 마셔라 놀 때 KFC에서 마감 시간까지 닭을 튀겼다. 다행히 아르바이트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와는 별개로 집에서 돈을 버는 것이 나 혼자라는 것이 억울해 스스로가 너무나 애틋했다. 무엇보다 그 돈이 내 돈이 아니라 가족 돈이 된다는 것이 울화가 치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평생 그렇게 돈을 혼자 벌었는데 말이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에 공격당해 일을 잃은 건데 딸년이 무시하고 원망하고 억울해한 거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내 자식이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 그때의 아빠가 그랬을 거다. 이제는 안다. 이빠가 경비원도 주유소도 막노동도 안 해본 게 아니라는 것을. 그것 마저도 녹녹지 않았음을. 그래서 더더 동굴 속으로 쪼그라들었음을.
철없는 딸은 지 돈이 가족 돈이 되는 게 억울하고 또 억울해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싸들고 여행을 떠났다. 절실히 가고픈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여행지도 여행 기간도 가진 돈에 맞춰 정해졌다. 돈이 떨어지면 집에 돌아와 다시 악을 품은 눈을 하고 동동거리며 돈을 벌고 또 훌쩍 떠났다. 남겨진 가족 걱정 따윈 없었다. 낯선 곳에서 홀가분함이 죄책감을 가려 주었다. 휴학을 최대한 다 쓰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6년간 최선을 다해 여행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항상 대학을 졸업한 후의 현실을 그려보았다. 내 돈은 평생 가족 돈이 될 거다. 그 나이가 되면 지금처럼 철없기도 힘들다. 좋은 직장을 가질 자신도 결혼을 할 자신도 없다. 계속 가난하게 살 거다. 앞으로 할 수 없을 일들이 명확해 보였다. 결론은 철없을 수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 아이러니하게도 가난 덕분에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거다.
삶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진다.
참 모를 일이다. 질풍노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취직하여 이탈리아에 왔다. 여행은 꿈도 못 꾸고 현실에 찌들어 살 거라 생각했는데 삶은 어느 순간 원 없이 여행이 가능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악에 받혀 돈에 혈안이 되어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내가 이탈리아에서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시간이 흘러 아빠도 많은 것을 놓아버림으로 평온을 찾았다. 하루는 아빠와 마주 앉았다. 아빠가 입을 열었다.
가난해서 미안했다.
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아니에요. 가난이 힘들지 않았던 것 은 아닌데 덕분에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어요. 후회 없이 다 했어요. 가난이 아니었으면 언젠가 할 거야 하고 미루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 다 해보면서 제가 정말 뭘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 명확해졌어요. 괜찮아요. 전 그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생각했다. ”생애 역경 총량의 법칙” 이 있다면 난 20대 초에 그걸 다 써서 앞으로는 좋은 날만 올 거라고. 그런데 인생 역경 10년 주기는 잊지도 않고 또 왔다.
결혼 1주년을 갓 넘기고 남편이 집을 나갔다. 혼자 뭐든 다 잘하던 나였는데 결혼을 하고 멍청이가 되었다. 애쓰며 살다가 남편을 만나니 너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산다는 것이 너무 편했다. 그런데 남편은 아니었다. 생활력 강하고 독립심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반했던 그는 변해버린 아내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우리 둘 다 결혼 앞에 서툴렀다. 그는 이혼을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집을 나갔다. 우린 일 년 반을 따로 살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할 줄 아는 것이 가이드뿐이었다.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면 혼자 해결할 힘과 경험이 필요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냈다. 내 삶에 자신이 생기자 투어도 풍성해졌다. 가장 힘들었던 그때 가이드로의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지금 까지 연락이 닿는 손님들이 대부분 그 해의 손님들인걸 보면 진정 나를 갈아 넣어 투어를 하던 시간이었다. 투어 외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했다.
내가 스스로 생을 책임질 자신이 생기자 그도 돌아왔다. 부부관계에 수평이 잡혔다.
시간이 지나 그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가 우리 결혼 생활 중 가장 감사한 시간이었어. 우리 부부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나에게도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어. 그 시간이 없는 우린 상상할 수 없어.”
그때도 생각했다. 내 삶의 역경은 더는 없을 거다. 그런데 썩을 10년 주기가 또 돌아왔다. (#망해라코로나)
20년 전 아빠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남편을 보았다. 남편이 질려서 집이 나갈 만큼 의지했던 과거는 잊고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남편을 몰아쳤다. 지난 반년의 시간 동안 나만 불안하고 무서웠던 게 아닐 거다. 돈을 벌다 못 버는 그의 불안과 무게는 오죽할까? 20년 전 직장을 잃은 아빠 곁엔 그래도 지 앞가림은 가능한 대학생 자식들이 있었지만 현재 그의 곁엔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과 유치원생 딸이 있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다. 적어도 난 바가지를 긁고 감정을 폭발시키기라도 하지 그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그러지도 못했다.
반년 간 남편에게 의지 할 수 없자 난 뭐든 다했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까지 생활력이 강했냐 물을 만큼 돈만 된다면 다 도전했다. 아이만 키우며 7년을 보내다 썩을 코로나 덕분에 수입을 낼 기획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작지만 수익도 냈다. 이는 큰 자신감을 부여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을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비로소 우린 함께 기획해 앞으로의 비전을 만들 수 있는 팀이 될 수 있었다.
10년 전 그의 가출사건 덕분에 부부로의 수평이 맞춰졌다면 다시 기울어버린 수평을 내가 맞출 수도 있는 거다. 다시 수평을 맞추는 과정에서 깨달았다.
그와 난 너무나 다르지만 추구하는 생의 모습이 같음을.
궁극적으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그의 방향키가 흔들리고 있다면 내가 함께 잡아주어야 함을.
그래야만 우린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고.
20년 전 첫 역경엔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고 집중하여 포기하지 않고 사는 법을 배웠다.
10년 전의 두 번째 역경은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번 역경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있다.
모든 역경이 내가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았다.
이 생각에 도달하자 며칠 동안 부담과 불안으로 짓눌려 있던 마음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당장 뿌리치진 못해도 견뎌낼 근육이 생겼다. 그때 아들이 다가왔다.
_엄마, 왜 우울해? 왜 안 웃어?
_응, 웃을 일이 없네.
_왜?
_이제 이안이도 학교에 돌아가고 앞으로 엄마가 해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_흠...힘드네. 엄마, 커피 마셔. 엄마 커피 좋아하잖아. 마시면 기분 좋아지잖아.
_그냥 지금은 마시고 싶지 않아.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오늘은 책 읽어 주기 싫은데...엄마 그냥 잘래.
_알겠어. 그럼 이렇게하자. 엄마가 잠들때까지 내가 책을 읽어줄게.
그 말이 “모든 걸 다 엄마가 할 필요는 없어.” 처럼 들렸다.
“엄마만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라고 들렸다.
“엄마 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지금을 이겨내려 하고 있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아이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래 깊게 잠들었다.
written by iandos
<근심을 잡아먹는 괴물이 사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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