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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Oct 31. 2020

엄마, 나에게 화를 옮기지 마세요

분노도 바이러스처럼  무한정 퍼져나간다


매년 9월이면 날이 선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한국 엄마에게 신학기는 긴장의 연속이다. 노트하나 연필 하나 준비물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지만 쉽지 않다. 타지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현지 엄마들의 도움이 절실한데 신학기엔 여의치 않다. 이탈리아 엄마들도 적응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이방인 엄마 현지인 엄마 할 것 없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신학기에 나만 허둥대는 것이  아니구나 싶어 위안은 된다.


하루는 하교하는 첫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문에서 아이가 나오자마자 볼멘 목소리로 원망 섞인 말을 토해냈다.


_엄마!! 왜 간식 안 넣었어. 나만 못 먹었잖아.

_뭐? 학교에서 준다고 했는데? 그리고 없으면 친구한테 좀 달라고 하지.

_안된대. 코로나 때문에 같이 먹으면 안 된대.


때마침 아이 담임이 날 보더니 '내일은 간식 싸주세요.' 당부했다.


_난 학교에서 준다고 들어서...

_학교 방침이 현재는 간식을 줄 수 없어요.


둘째의 유치원에선  학교에서 개개인으로 간식을 챙겨줄 테니 집에서 가져오지 말라고 공문이 왔었다. 유치원 공문만 읽고 당연히 초등학교도 같은 규정이라 생각하고 챙기지 않았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간식도 없이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플까... 친구들 다 간식을 먹는데 혼자서 민망했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나에게 화가 났다. 이런 작은 것을 놓치다니, 그때 아이가 말을 걸었다.


_엄마 그런데  음악 공책 왜 안 넣었어?

_뭐라는 거야? 엄마 분명히 다 챙겨 넣어두었어.

_선생님이 음악 공책 뭐하고 했는데 난 그게 모르는 말이라서 그냥 없다고 했는데...

_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모르면 물어봐야지. quaderno pentagrammato (음악 오선 노트)라고 하지 않으셨어?

_맞다 그거!

_엄마가 가방에 넣어뒀어. 모르는 말이면 그게 어떤 공책이냐고 물어봤어야지!!! 엄마가 모르는 건 무조건 물어보라고 했지? 학교에선 네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네가 안 물어보면 선생님이 네가 모른다는 어떻게 알아!!

_응... 엄마 미안해...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돌렸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낼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화를 냈다. 그것도 과하게. 사실 어디에라도 화를 내고 싶었다. 대상이 필요했다. 아이에게 분풀이를 한 거다. 화내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즉각적인 방응이 나오는 대상이 필요했다. 그게 아이였다.


걸음을 멈췄다.

아이의 손을 잡고 고백했다.


_화내서 미안해. 사실 이안이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어. 엄마에게 화가 난 거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 못해서. 그리고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화가 났는데 , 이안이에게 화를 냈어. 미안해.


아이는 가만히 생각이 잠겼다. 이내 고개를 들어 답했다.


엄마가 나에게 화를 넘겨주려고 한 거야?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그런데 엄마, 그렇게 해도 안 나아지는데
 엄마가 나에게 화를 넘겨줘도
엄마에겐 화가 반이 남아있거든.

그런데 내가 반을 가지고
또 누구에게 반을 주고
그 사람이 또 반을 주면
모두가 화가 나게 되는 거야.


아..... 내가 한 게 이거구나. 빨리 벗어나려고 아이에게 나의 화를 떠넘기려고 한 거구나. 그런데 그러면 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모두에게 화를 옮기게 되는 것이구나.


_그럼 어떻게 해야 해? 엄마 혼자 가지고 있는 이 화를 어떻게 없앨 수 있는 거야?


들어주면 돼.
누군가가 다 들어주고
자신의 기쁨의 반을 엄마에게 주면 화가 없어지는 거야.
 들어달라고 해.





어제 둘째가 하원하고 집에 오는 길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싶다고 집에는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였다.


_코로나 때문에 밖에서 못 놀아. 친구들 다 집에 갔어. 너도 집에 가야지.

_아니야. 놀 거야. 밖에서 놀 거야. 이도 친구들이랑 놀 거야

_엄마 화내. 엄마 그만하라고 말하고 있어.


아이는 꼬이지도 않는 팔짱을 끼고는 잔뜩 토라져 눈물이 흘리더니 저 멀리 도망을 쳤다.


_이리 와! 이리오라고! 혼나!! 엄마 셋 셀 거야 셋까지 안 오면 정말 혼나는 거야!! 하나 둘! 셋!!!


그때 옆에 서있던 첫째가 나의 팔을 잡았다.


_혼내지 마. 이도 혼내지 마. 그러면 이젠 내가 화내. 내가 화가 나려고 해. 이도~ 이도~ 오빠한테 와


아이는 뿔이난 동생에게 다가갔다.


_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화가 났어? 그런데 오빠랑 놀아도 재미있는데 오빠랑 놀까?


그리고 아이의 배를 쿡쿡 찔렀다.


_여기 안에 카카(똥) 있어? 카카(똥) 있네~


눈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가 까르르 넘어갔다. ‘아니야~~ 카카 없어~~’ 금세 웃음이 퍼졌다.


_이도 이제 집에 갈까? 집에 가야지 자고 내일 또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놀지.


아이는 오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다다를 때 즈음 아이가 동생에게 물었다.


_이제 기분 좋아졌어? 화 안나지?


그러자 다시 울먹울먹 '나는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_엄마 미안,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해서 이도가 화가 나려고 하네. 걱정 마. 내가 금방 기분 좋게 만들어줄게. 이도~이도~ 오빠랑 집에 가면 뭐하고 놀까? 우리 초콜릿 먹자!


울먹이던 아이는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팀 페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 (2018, 토네이도) 에는 자전거 타기에 푹 빠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매일 전속력으로 40킬로를 달렸고 목적지까지는 어김없이 43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느긋하게 달리고 싶어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풍경을 즐긴다.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고 타이머를 확인한 그는 놀란다. 45분이 막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숨 막히는 고통과 스트레스는 제 삶에서 겨우 2분의 시간을 줄여주었을 뿐입니다. 극한의 노력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별 것 아닌 헛된 노력이었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멈추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으악'하는 소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게 신호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라고 틈틈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멈출 줄 아는 것, 그리고 좋은 신뢰를 얻기 위해 2분 정도 기다려줄 줄 아는 것.

- 타이탄의 도구들 중에서


난 3초 만에 아이의 화를 멈추려 했다.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 아이의 화를 멈추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오래 저 화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요했던 것은 단, 2분이었다. 기다리고 들어주고 기쁨을 나눠주는 2분. 2분의 시간이면 화는 퍼져나가지 않는다. 누구도 옮지 않는다.


내 화를 누군가에게 넘기는 순간, 무섭도록 빠르게 번진다.


화도 바이러스도 옮기지 말자.

무엇보다
 가족과 이웃에게는 말이다.

화를 옮기는 것은 3.
기쁨을 옮기는 것은 2.


2분은 기다릴 수 있지 않은가. 억 겹의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화는 옮겨도 사라지지 않는다니 말이다.



그나저나 아들아, 이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거니?
이탈리아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거니?
그럼 엄마는 이탈리아에서 초등학교를 다시 다녀야 할까 보다.


written by iandos



[7살 철학자 이안이 와의 문답 라이브] #유튜브 #로마가족

https://youtu.be/auU6GvR8T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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