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를 시작한 아들에게
_엄마, 나 개 키우고 싶어.
_그래? 근데 엄마는 생각이 없어.
_내가 키운다니까?
_아냐, 엄마가 키우는 거야. 생각해봐 아빠는 일하고 너랑 이도는 학교에 있고, 그럼 강아지랑 가장 오래 있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 그리고 우린 매년 한국에도 길게 휴가를 가고 여행도 자주 하고, 개가 있으면 불가능 해.
_엄마, 나는 할 수 있다니까?
_그리고 개를 키우려면 돈도 필요해. 개 백신, 개사료에,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하지. 그리고 하루에 네 번 이상 산책도 시켜야 한다고. 네가 정말 할 수 있겠어?
_할 수 있어. 학교 가기 전에 산책시키고 갈 거야.
_돈은? 돈은 어떻게 마련할 건데?
......
지난 2년, 팬데믹을 겪으면서 아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네가 스스로 구해.
그것을 가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네가 스스로 벌어.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혔다. 수개월이 지나 하늘길은 다시 뚫렸지만 각국에 도착 후 격리가 의무사항이 되면서 현실적으로 한국-이탈리아 간의 여행은 불가능했다. 남편이 가이드 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0이 되었고, 너무나 감사하게 유튜브를 통한 랜선 투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기존 수입의 1/10 수준이었다. 불안정한 시간 속에 소득이 멈춤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살아 나가기 위해선 줄어든 수입만큼 실생활에서의 지출을 줄여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 직시와는 별개로 속절없이 소비에 대한 욕망은 수시로 자극받았다. 엄마인 나조차 이럴진대 현실을 선명하게 느낄 수 없는 아이들은 순수하게 가지고 싶은 것을 욕망하고 표현했다. 예전 같으면 못 이기는 척 이번만이야 하고, 사주었겠지만 돈은 물론이고 마음의 여유도 없으니 단호한 거절로 소비 앞에 벽을 쌓았다. 아이이는 물론 우리 앞에도 벽은 두껍고 높게 쌓여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대사로 거절을 말해야 할지 매번 갈팡질팡 했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안돼!"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하나? "지금은 집이 너무 힘들어서 사줄 수 없어".라고 힘없이 말해야 하나? 아니면, 힘들어도 우리 부부가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이들에겐 티 내지 않아야 하나?
이어지는 의문. 수익이 1/10로 줄었다면 그 정도에 맞춰 일상의 지출을 욱여넣어야만 하는 걸까? 수익을 더 늘일 방법을 찾아볼 순 없나? 수익에 맞춰 지출을 줄이는 방법과 지출에 맞춰 수익을 늘이는 방법 중,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전자뿐인가?
남편이 회사에 소속되어 가이드로 돈을 벌 때, 우리 가족의 수입이 유일하게 남편의 직장을 통해서 창출되었다. 결코 적지 않는 금액이었고 계절마다 여행도 가능했다. 우리 삶에 있어 남편이 월급으로 최대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우리 가족이 한 달에 벌 수 있는 최대치였다. 돈은 직장을 통해서만 벌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살았기에 마음은 편하면서 불편했다. 직장이라는 테둘이 안에서 계속 돈을 벌 수 있다면 해피엔딩이지만 이 세상에 영원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설마 영원은 아니어도 오래는 지속되겠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순수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믿음도 포함이라는 것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혀도 제대로 찍혔다. 직장도 직업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심지어 격리가 2주 가 아니라 2 년짜리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시로 격리에 들어갈 전망이다. 설마 영원하지 않음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불포함인 것은 아니겠지? 찍힌 발등의 상처를 봉합할 시간도 없이 불똥이 떨어졌다. 찍힌 발등에 불똥 추가라니, 놀랍지도 않다. 양아치 코로나가 하고도 남을 일이다. 우린 수익을 창출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랜선 투어, 랜선 미술사 강의, 책 출간을 통한 인세, 온라인 글쓰기 강의, 온라인 매거진 기사 연재, 종이 잡지 취재 연재, 방송 취재 및 번역, 의뢰받은 원고 작성, 올리브유 온라인 판매, 해외구매대행, 소설 추천사, 방송 출연, 방송 취재까지 지난 2년간 우리 부부가 오프라인 투어 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일들이다. 일의 분야는 10배가 넘게 늘어났지만 비정기적인 수입이었기에 기존 남편이 벌던 수입에는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익은 직장에서 라는 공식에 묶여있던 우리가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10개의 가지로 뻗어나갔음은 기특한 일임이 분명하니 박수는 쳐 주자. 짝짝짝.
위 모두는 다른 분야 같지만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뿌리는 동일하다.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고 남편이 20년 가까이 가이드라는 업을 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능력을 가이드라는 일 속에서만 펼칠 수 있다고 우리 스스로 한정 짓고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가치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쓰임이 있었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았다. 이 분야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으나 투어가 멈추고서야 비로소 우리 눈에 들어왔다. 아니, 모르는 분야였으니 시도할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가 이런 능력이 있다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를 통해 노출하자, 이 부분이 필요한 분야에서 컨택이 들어왔다.
가이드로 만족할 만한 수입을 얻을 수 있을 때는 우리가 가진 능력을 굳이 기록하고 알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산 시간과 우리가 여행업에 몸 담았던 노하우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깨닫지 못해도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안정적이고 큰 고민 없이, 진정 감사했던 시간이다. 그 시간이 무너지고 새롭게 우리를 들여다보게 된 지금도 감사함은 마찬가지다. 불안과 두려움이 공존하지만 그 안에서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음에 또 감사하고.
2년의 팬데믹을 겼으며 무너진 것이 한 가지가 더 있다. 아이들 교육에 관한 생각이다. 이탈리아는 교육열이 강한 나라가 아니다. 비록 이탈리아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에도 안테나의 방향은 향해 있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발 맞추어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나름 비싼 비용을 내고 영어공부도 시켜봤다. 그런데 코로나로 당장 우리 가족 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니 자식 교육은 뒷 전이 되었다.
바이러스가 변이의 변이를 거듭하며 팬데믹의 상황이 끝날 듯 말 듯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그때마다 이탈리아에선 코로나에 관련된 새로운 규정이 쏟아졌다. 한 주 걸러 발표되는 새로운 규칙에 맞추어 삶은 적응을 해야만 했고 일상은 모양을 바뀌었다. 2년간 이 것을 반복하다 보니 우리의 삶은 요상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어느 순간 원래의 형태를 기억해낼 수 없게 되어 세상이 구겨놓은 모양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이 구겨지지 않기 위해선 '기존에 알던 것들, 배운 것들은 소용없다.'가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매 순간 변형시킬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것이 피부가 배일 듯 너무나 날카롭고 선명하게 깨달았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사람도, 회사도, 상사도, 동료도 없으며, 여기엔 부모도 포함이었다. 결국 매 순간을 돌파해 나가는 힘은 내가 가진 것을 정확하게 알고, 현명하게 사용하고, 망설임 없이 시도하고, 두려움 없이 실패하며, 성공적으로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생의 유연함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세상과 연결시키는 습관이 필요했다. 결핍을 즐기고 건강하게 욕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루지 못한다 해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을 힘들이지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나는 불혹을 코앞에 두고 무수한 두려움과 유혹에 휘둘리며 펜데믹이 깊숙이 일상에 침투해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선행 학습되어 자신이 하고 있다는 인식도 없이 이 사고가 가능하길 바랐다. 유연한 마음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최대한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고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작년 여름, 무모하게 떠났던 캠핑카 여행은 낯선 방식의 여행이었음과 동시에 매일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여행이 불가능할 땐 아이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장소들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에 대해 직접 물었다. 미술관 박물관은 수시로 방문하고 아이들은 현장에서 질문을 쏟고 답을 얻는다. 낯 섬이 익숙하고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이 당연하며 깨달음을 즐기는 어린이로 자라나길 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 앞가림 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우니 니들은 니들 알아서 살아라 쫌!' 이 진짜 속마음이다. 거창하게 적었지만 그 알맹에 대단한 신념 따윈 존재하진 않는다.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주기보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나이키 덩크를 절실하게 사고 싶다. 때문에 아이의 욕망은 아이 몫으로 선을 긋고 싶다. 너희들의 욕망은 존중하고 응원해. 다만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 셀프로 하자.
"경쟁자가 아니라 위대한 사람의 영감을 활용해야 한다. 경쟁자가 따위가 당신을 조종하게 만들지 마라. 우리는 더 좋은 노래를 만들려면 미술관에 가서 수백 년을 사랑받은 그림을 봐야 한다."
[ 타이탄의 도구들] , 팀 페리스
"스트레스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졸업과 동시에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진정 호기심을 느끼는 분야를 탐구하려면, 멋진 일을 찾으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한다. 삶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불투명하고 모호하고 모순투성이다. 이걸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을 키워라. 운동을 하고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두려워하지 마라. 글쓰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옳은 답이나 옳은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선택한 길을 어떻게 갈지 생각하라."
[마흔이 되기 전에], 팀 페리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아이가 욕망을 이야기하면 이렇게 답하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네가 스스로 구해.
그것을 가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네가 스스로 벌어.
이 말에 아이는 어김없이 "나는 어린데, 어떻게 돈을 벌어?"라고 되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어려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네가 스스로 생각해 봐. 세상에서 돈을 버는 방법은 하나야. 돈은 누군가로부터 너에게 들어오는 거야. 네가 돈을 주고 돈을 받을 수도 있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지. 네가 가진 것을 남들이 모른다면 우선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리는 것이 시작이야. 네가 가진 것이 물건이라면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고. 네가 가진 것이 아이디어나 기술이면 글이나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납득시켜.”
지난 2년 동안 이 대화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다시 개를 키우고 싶다던 아이와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_개를 키우는 돈은? 돈은 어떻게 마련할 건데?
_......
나의 질문에 아이는 대답 대신 주저앉아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뒤 보여준 종이에는 개를 키우기 위해 매일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필요한 개의 정보 개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들 키우고 싶은 개의 모습까지 빡빡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 속엔 아이의 장난감이 들어있었다.
_이걸 팔아서 돈을 벌 거야. 그렇게 돈을 벌어서 개를 살 거야. 개는 내가 키울 거야. 학교에 가기 전에 내가 산책을 시킬 거고.
2년의 팬데믹을 보내고 아이는 더 이상 엄마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부모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일찍 철이든 아이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아이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다음 날 로마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좌판을 펼치고 물건을 홍보하고 가격을 흥정했다. 하루 동안 아이가 번 돈은 총 31유로였다. 장난감을 기증한 동생에게 11유로의 수익을 배분했다. 이튿날, 아이는 전 날 판매 경험을 토대로 적정한 가격을 산정하여 한 번 더 좌판을 펼쳤다. 장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아이의 고민은 무엇을 팔 까에서 어디가 더 장사가 잘 될 놀이터 일까로 전환됐다.
며칠 뒤, 수영 수업을 마치면 언제나 음료수를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는 이미 자신이 번 돈으로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고 있었다. 내가 돈을 버니 이런 게 좋네, 아이는 웃으며 흥겹게 계단을 올랐다. 스스로 돈을 버는 것만큼 자신이 번 돈을 쓰는 것도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된 8살이다.
나는 물론 아이도 어떠한 결핍 속에서도 욕망을 억누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가지는 것이든 되는 것이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깊게 들여다본다면 스스로 실현할 기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즐겁게 곧장 실행에 옮기자. 무엇을 가지지 못해도 무언가가 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이를 반복해 나가다 보면 바뀌는 세상에 맞추어 속절없이 일그러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생을 빚어나가는 우리 스스로를 얻을 것이니. 그 무엇보다 값진 고유한 나를 가질 것이니.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꿀벌이 되자. 아들아, 세상에 어떻게 변해도 나라는 글을 써나가는 나의 생의 작가는 내가 되자.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 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추신 : 마지막으로 너와 세상을 연결하는데 도움이 될 책을 한 권 추천할게. 엄마가 2020년 3월 코로나로 락다운이 되던 날 읽었던 책이야. 엄마는 이 책을 다 읽은 날 생애 첫 개인 사업자 신고를 했어.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