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21
2007년 2월의 어느 날,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로마 북쪽의 작은 중세도시 아레초로 향했다. 우린 겨울의 쓸쓸한 중세도시를 상상하며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여정에 끝에 우리의 추억은 기대와 전혀 다른 장면들로 채워졌다.
당시는 이탈리아의 카니발 기간이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카니발 퍼레이드가 있었다. 마을 곳곳 아이들이 카니발 옷차림을 하고 종이꽃가루를 흩날리며 뛰어다녔다. 쓸쓸할 거라 생각했던 골목길마다 종이꽃가루 뿌려져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을 지냈을 뿐인 나에게 그날은 아주 강렬한 장면으로 남았다.
이탈리아어로 카르네 발레 (CARNE VALE) 라고 불리는 카니발은 가톨릭과 관련이 있다. 예수가 부활 전 40일 간 고난을 받으며 기도했던 그 기간을 생각하며 부활절 40일 전을 ‘사순절’이라고 하여 신자들이 금욕과 단식, 그리고 참회를 하며 지내는 기간이다.
이 사순절이 되기 전 열흘을 사육제라고 부르며, 우리에게 주어진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흥겹게 그리고 즐겁게 즐기면서 사순절을 준비하자는 의미의 취지가 있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축제 시작일이 매년 바뀌며, 보통 1월 말에서 2월 사이에 시작해 사순절 전날에 끝난다.
카니발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중 이탈리아어로 ‘고기’를 의미하는카르네(CARNE)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가장 강하게 받아들여진다. ‘고기를 멀리하다’는 카르네 레바 레(CARNE LEVARE: TO REMOVE MEAT)와 ‘고기여 안녕’의 카르네 발레(CARNE VALE: ADDIO TO MEAT)에서 ‘카니발’이 파생되었다고 본다. (물론, 현재 이탈리아 사람들 대다수는 사순절 기간에 고기를 가까이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새기며 금욕을 해야 하는 사순절 기간이 시작되기 전, 풍족하게 먹으며 연회를 벌이고 서커스, 가면무도회 등을 즐기던 풍습이 오늘날 카니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즌에 이탈리아에 서커스 공연이 많은 건가?) 한국어로 사육제(謝肉祭)라고 하는데, 이 역시 ‘고기를 멀리하다’ 또는 ‘고기를 없애다’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의 카니발은 세계 10대 축제로도 유명한 베네치아 카니발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보통 이탈리아의 카니발은 베네치아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다.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이 알려져 있는 도시가 베네치아 인 것이고 카니발 기간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크고 작은 도시들이 카니발의 흥겨움으로 가득하다.
베네치아 카니발도 화려하고 멋지지만 정겹게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일상 속의 카니발 모습들을 무척 좋아한다. 로마에서도 카니발 기간의 주말이면 이탈리아 특유의 카니발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 모습들은 소박하지만 유쾌하다.
아이들은 각각의 귀여운 분장을 하고 부모님과 함께 거리로 나온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분장을 하고 거리를 누빈다. 색색깔의 종이꽃가루가 가득 든 봉지를 들고서 말이다.
거리에 종이꽃가루를 날리며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서 그렇게 꽃가루 한 줌은 아이들에게 행복을 한 가득 선사한다. 흩뿌려진 종이꽃가루들이 로마의 돌바닥 사이사이 소복하게 채워진다
2009년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손에는 한복세트가 들려 있었다. 폐백 때만 입게 될 그냥 대여하려던 우리에게 해외에 사는 아들 내외의 품에 한복을 안겨주고 싶은 시어머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한복.
그렇게 결혼 기념 정도가 되겠다 싶었던 한복을 이 타지에서 명절과 행사 때마다 주구장창 입게 될 줄은 몰랐다. 한복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오며 남편과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언젠가 꼭 한복을 입고 베네치아 카니발에 가보자고. 그 장난 같던 말이 매년 카니발 기간이 돌아오면 힘이 더해지고 어느 순간 우리의 버킷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결혼 후,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의 약속은 5년이 지나 아들을 낳고 현실이 되었다. 2013년 6개월 된 이안이를 안고 우린 베네치아로 향했다. 물론, 한복을 입고서 6개월 된 아들을 안고서 베네치아를 누빈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내내 남편에게 갖은 원망을 했다. 당시 난 심지어 수유까지 해야만 했다!! 한복이 수유 중인 어미에겐 결코 친절한 옷이 아니었음을!!)
이 날은 우리 가족의 가장 유쾌한 추억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가장 큰 자랑이 되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채색의 대리석 건물과 옅은 청록 빛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복은 참 아름다웠다. 우리를 지나쳐 가는 모든 이들은 감탄했다. 남편은 마치 ‘베니스의 개성상인’ 같았다
베네치아의 카니발도 억압을 받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1797년 오스트리아가 세운 롬바르도 베네토 왕국이 베네치아를 지배하면서 결국 이듬해, 카니발은 불법행위로 간주되고 특히, 가면 착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한다. 그 후 인근 섬 등지에서 간신히 명맥이 이어지던 카니발은 1930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다시 금지된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197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베네치아 시민들의 혼신적이 노력에 힘입어 이탈리아 정부는 베네치아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핵심으로 전통 축제의 부활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현재 베네치아 카니발은 이탈리아 최대의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 가면 축제를 비롯해 수많은 축제들이 존재한다. 아무리 작고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라 하더라도 어김없이 그들 만의 축제가 있다. 대다수의 축제들은 막상 가면 조금은 허탈할 정도로 소박하다. 축제라 불리지만 그들만의 잔치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모습이 무척 부럽다.
그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그들이 좋아서 하는 거다
오래전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시에나의 팔리오 축제를 본 적이 있다. 1656년 시작된 이 축제가 멈추었던 것은 세계 2차 대전 시간뿐이었다. 시에나의 축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모든 축제들이 오랜 시간 유지되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본다.
그들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엄청난 열의? 어쩌면 그 힘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바로 축제를 하는 그들이 즐거워서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겠지만 무언가를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함의 해답은 언제나 '내가 즐거워야 한다'이다. 이탈리아의 축제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은 축제의 주체인 그들이 즐거워한다는 것, 즐기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이들의 축제는 그 자체보다 그 주체를 보는 즐거움이 크다.
우리가 좋아서 즐거워서 하자,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러 오고 그것이 전통이 되고 유명해진다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축제들은 즐겁게 무언가를 해보자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시작해 오랜 시간 그들의 후손에 의해 즐겨지고 이어진다. 그 즐김의 근원은 삶의 여유로움(삶의 물질적인 풍족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이 아닐까 싶어 부러운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축제기간이면 아이들이 아빠 어깨에 올라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축제는 아빠의 어깨너머로 아이들에게 스며든다.
1월 말에서 2월 사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게 되는 여행가방에 아이들의 한복을 챙겨 오라 추천한다. 아이들의 한복은 부피도 작으니 부담도 없을 거 같다. 카니발 분장을 한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도 한복을 입고 이탈리아를 즐겨본다면 어떨까?
분명 아이들에게도 부모님들께도 멋진 추억이 될 테고, 이탈리아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은 아이들은 엄정 난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라도 만나는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난리가 날 거다.
장담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호들갑과 적극적임 그리고 솔직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를 경험한 아이들은 분명 한복과 이탈리아와 사랑에 빠질 거다. 무엇보다 어디에서 길거리에 원 없이 종이꽃가루를 뿌려보겠는가!! 가슴 한가득 안아야 하는 종이꽃가루 큰 한 봉지가 단돈 80센트다!!!
이안이는 베네치아 카니발 이후 어린이집 유치원을 거치며 카니발 공식 복장은 한복이다. 아이 눈에도 한복은 멋졌나 보다. 처음 어린이 집에서 카니발 행사로 한복 입은 날 이안이는 단연 그 날의 주인공이었다. 이후로 아이는 한복을 왕자님 옷이라고 불렀다. 카니발은 왕자님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올해 아이는 작년 한국 휴가 때 새로 산 한복을 입었다. 그리고 이번엔 이도도 함께했다. 이도 옷은 공주님 옷이라고 했다.
매년 카니발 행사에는 인기 복장이 있다. 작년은 스파이더맨(수 많은 슈퍼 히어로 중에 유독 스파이더맨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뭘까?) 과 엘사였다. 올해는 파자마 삼총사와 역시나 엘사(엘사의 아성을 무너뜨릴자 누구인가!!)
이안이와 이도가 유치원에 도착했다. 매년 한복에 열광한 이들은 유치원 선생님들이었는데 올해는 반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특히 이도는 여자애들이 진짜 관심을 보였다 남자애들 마저 이도를 오늘은 유치원에 놓고 가라며 애원했다.
한복을 생각하면 단아하다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해외에서 한복을 만날 때면 정말 화려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튄다. 세상 모든 공주님들이 모인 카니발에서도 역시나 한복 입은 공주님이 최고다.
이번에 발견한 하나는 아이들인 복주머니에 무척 관심을 보였다는 거다. 곧 한국 휴가인데 돌아오는 길에 복주머니를 잔뜩 사 와서 아이들에게 선물해야겠다.
이안이는 불편한 옷은 절대 입지 않는다. 한 번은 밖에서 한복이 불편해 보여 갈아입을까 하니 싫단다. 그리고 말했다.
난 이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너무 좋아!
그래,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
며칠 뒤 남편의 동절기 남부 투어의 마지막 날은 설이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 남편 배웅을 하려다 깜짝 놀랐다.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명절에 투어를 하게 되면 꼭 한복 투어를 하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정말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다.
나폴리에서 찍은 그의 사진을 보니 그도 한복을 입은 모습이 좋았나 보다.
이 사랑스러운 남자들 같으니.
남편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한국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상한 축제를 만들고 일회성 행사에 돈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베네치아 거면 축제처럼 한복을 입는 날을 만들면 어떨까? (10월 21일이 한복의 날이다. 10월 계절도 좋지 아니한가!!)
한국의 모든 사람들 (아니면 이탈리아 카니발처럼 아이들만.) 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다니면 그 모습이 신기하고 좋아서 사람들이 보러 오게 된다면? 우리가 즐거워 시작한 일에 즐기는 우리를 보러 사람들이 오게 된다면 멋지지 않겠냐고.
이런, 카니발 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멀리까지 왔다.
여하튼 내년 카니발 행사에는 이안이가 이도 손을 잡고 종이꽃가루를 뿌리며 로마를 뛰어다니겠다. 카니발, 축제는 끝났다. 종이꽃가루가 바람에 흘러가니 나무에 어느덧 꽃이 피었다. 곧 봄이다.
written by iandos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3월 한 달은 한국 휴가 일정으로 휴재합니다. 4월 다시 원고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