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이안이 나란데, 왜 이안이 말을 안 써?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에 들어서다 위층 아저씨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아이가 물었다.
여긴 이안이 나란데, 왜 이안이 말을 안 써?
순간,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저 안에서만 맴돌았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봤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한국계 미국인 배우가 sns 에 전범기 티셔츠를 입은 친구의 어릴 적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는 그였기에 많은 이들이 실망을 표했다. 그는 곧장 사과문을 올렸다. 문제는 한국말로 사과를 하고 영어로는 그를 비난한 한국인들에 대한 푸념을 써 놓은 거다. 댓글의 대부분이 결국 그는 미국인이다라는 내용이다.
댓글을 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한국말은 부모로 인해 알게 된 언어이지만 속내를 터 놓을 언어는 영어였던 것일까? 무의식 중에 자신을 이해해주고 옹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을까? 한국인? 미국인?
이안이는 현재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만 18세가 되면 이탈리아와 한국 국적 중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크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만약 아이가 이탈리아 국적을 선택한다 해도 그건 그냥 선택일 뿐이지 아이는 당연히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여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인종으로서) 한국말도 유창한 아이가 동시에 이탈리아를 자신의 나라로 여기고 있을 때의 아이의 혼란은 전혀 예상 못했다. (아이는 이탈리아는 이안이 나라 한국은 할아버지 나라라고 부른다.) 아이가 심각하게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이건 좀 의아한데?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이에게 묻는다.
_이안이는 코레아노야? 이탈리아노야?
_코레아노지.
_그럼, 이안이 나라는 어디야?
_로마.
넌 한국사람이기도 하고 이탈리아 사람이기도 해, 라는 대답해주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솔직하게는 나 자신이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이를 이탈리아에서 낳고 이탈리아에서 키우며 이탈리아 교육을 받게 하면서도 아이는 확고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을 자신의 나라라고 여기며 자랄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물론, 결국은 아이 자신이 자라며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겠지만 학교에서 배워온 이탈리아 국가를 재미있어하며 부르는 아이를 보면(생각해보니 아이가 애국가는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마냥 귀엽다가도 뭐라 정확히 말하기는 힘든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지난 3월 한 달간 한국에 머물렀다.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갔고 우린 다시 로마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한 달 만에 유치원에 나타나자 학교가 떠나가라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반겼다. 그렇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부터 아이는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썼다. 학교는 한글학교만 가겠다고 했다, 이탈리아 말을 다 잃어버렸다고 했다.
한두 번 한국 휴가를 다녀온 게 아닌데, 이탈리아에 돌아오면 아이의 입에서 바로 이탈리아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심지어 숫자 세는 법까지 모르겠단다. 한 달의 한국 휴가 동안 아인 정말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다 잊고 한국을 즐겼던 걸까? 아이들은 빨리 흡수하는 만큼 빨리 날려 보내는 걸까? 이렇게까지 싹 잊어버릴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울 만큼 유치원 등원을 거부했다. 어떻게든 달래서 유치원에 들여보내지만 아이가 겪는 스트레스를 내가 헤아리긴 힘들 것 같다.
또다시 아이는 길에 서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짜증을 내면서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했다. 화를 내려다 숨을 고르고 말했다.
_이안아, 이탈리아 말을 잃어버렸으면 다시 찾으면 돼.
_어디에 있는데?
_이안이 마음속에 있어.
_마음? 마음은 배 안에 있는데 어떻게 찾아?
_이안이 지도 잘 그리지? 학교에서 지도를 그려 그리고 그걸 보고 찾으면 되지.
_배 안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찾아?
_눈을 감고 있으면 보일걸?
_........ 알겠어. 찾아볼게.
유치원을 마치고 나온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
_재미있었어. 그리고 너무 기뻤어! 아직 다는 아니지만 이탈리아 말을 찾았어!! 마음속에 영어도 있던걸?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났다. 아이는 잃어버렸던 언어를 모두 찾았다. 아이에겐 두 언어가 균형을 찾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두 언어의 아이, 아이는 언어를 찾듯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것이다. 자신의 지도를 만들고 자신의 마음속을 여행하고 그렇게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가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답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
p.s. 이건 여담인데 작년 늦은 여름이었나 보다. 길을 걷다 이탈리아 젊은이 무리를 봤다. 그중 한 청년이 전범기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티셔츠 전체 사이즈에 맞게 아주 크게 프린트되어있었다. 겉에 입은 셔츠의 단추를 다 풀고 있었던 것을 보면 꽤 마음에 드는 티셔츠였나 보다.
그를 붙잡고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아냐? 하고 물었다. 일본 여행 때 교토에서 산거라며 예전 일본 해군 깃발이라는 설명을 들었단다. 내가 아니다. 그거 일본 전범기다. 하니, 이해를 못했다. 나치 표시랑 같은 거다. 다시 말해주니, 옆에 있던 친구들이 야!!! 이거 입으면 안 되는 거네!!! 난리가 났다.
청년은 한 번 더 강조해 말했다. 근데 나 이거 교토에서 샀다니까? 이게 일본에서는 문제가 안돼? (어떻게 이런 의미를 티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일반 상점에서 팔 수 있냐는 질문인 듯했다.) 일본은 독일처럼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이건 분명 잘못된 거고, 입고 다녀선 안된다. 그는 큰 잘 못을 저지른 듯 급하게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모두 꼭꼭 채웠다.
헤어지며 그가 말했다. 고마워. 정말 몰랐어. 분명, 정말 몰랐을 거다. 이탈리아 청년이 그 의미를 알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알게 되니 부끄러워했다.
기사를 접하고 나 역시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그 배우의 행동이 남 일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친구의 사진에서 전범기를 발견했을 때, "좋아요" 가 아니라, 그 상징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글을 남겨 놓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물론 그는 영어로 썼을 것이고, 그를 팔로우하는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럼 멋진 피드백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도 로마에서 남매를 키우며 너무나 뿌듯하고 힘이 났을 것 같은데, 안타깝다.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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