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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Jun 05. 2018

축제보다 나체

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21

우리가 4년 반을 같이 살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 전에 어쩜 이렇게 나랑 잘 맞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잘 맞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가 나를 맞춰주고 있었던 거였다. 결혼 후 우린 진짜 안 맞는 사람이란 것을 깨닫고 꽤나 징하게 위기를 겪었다. 이래저래도 결혼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너무 안 맞았다.


그와 마지막 결론을 내기 위해 떠났다. 오로지 둘만 있어보자. 이 모든 문제가 정말 둘의 문제인지 아닌지 제대로 들여다보자. 보름 남짓의 여행이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린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참 안 맞는 우리가 딱 하나 완벽한 순간이 있었으니, 그게 여행이었다.


난 정말 욕심 많고 무모한 여행을 계획하는 스타일이고 그는 그런 여행을 실행함에 거침이 없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면 우린 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네, 그러고 일상에 돌아오는 거다. 우리 둘은 빡세게 여행하며, 이탈리아 사는 것을 좋아하고, 또한 그걸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난 일요일 딸기 축제에 다녀왔다. 전날 밤늦게 친구랑 톡을 하다 축제 이야기를 들었다. 자는 남편 깨워, 딸기 축제한다는데? 하니 잠결에 그가 답하길, 가.


앞에 장황하게 글을 써 놓았지만, 우리가 이거 하나는 제대로지. 떠남에는 거침이 없지. 다음 날 오후, 우린 딸기 축제로 향했다. 딸기 축제가 열리는 곳은 로마에서 차로 40분 정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작은 마을 네미(nemi). 2000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네미 마을 아래에는 그림 같은 네미 호수가 펼쳐진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일 년에 한 번, 6월 첫째 주 일요일 딸기 축제(sagra di fragola)가 열린다. 1922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가 올해로 85번째다. 특히 유명한 것은 fragolino라고 불리는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 만한 작은 딸기다.


전날 밤 친구에게 축제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곧장 실행에 옮긴 이유는 단 하나, 이안이가 엄청난 딸기 덕후다. 길을 걷다가도 딸기만 보이면 무조건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제대로 딸기를 먹여주겠다며 야심 차게 출발했다.  


지난 3월 한국 휴가에서 시차 적응에 실패한 아이들을 새벽에야 겨우 재우고 남편과 티브이를 보는데 광고에 이런 문구가 나왔다.


연인과 함께하면 여행
 가족과 함께하면 축제


 어둠 속에 티브이를 바라보던 남편이 냉소를 보내며 한마디 했다.


 _저 카피 만든 사람이 여행을 많이 못해봤네. 축제 때는 여행하면 안 돼. 개고생이야. 사람 많지. 차 막히지.

그렇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여라. 우리가 그 축제에 온 거다. 그것도 아들딸 함께 말이다.


마을로 오르는 도로 초입부터 길가에는 불법 주차된 차들로 줄을 세워놓았다. 작은 마을이니 당연히 길도 좁은데 엄청난 인파에 발 디딜 곳 이 없다. 집돌이 아들은 도착과 동시에 집에 가자고 징징징. 딸은 유모차에서 내리고 싶어서 찡찡찡.


가족과 함께 하면 축제
 축제에 가족이 함께하면 개고생


 그래도 딸기는 먹어야지,. 소복하게 쌓인 작은 딸기 위에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두덩이 얹고 생크림 올려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세상에 이런 맛이!!!! 하나로 아이와 나눠먹을게 아니다. 얼른 해치우고 바로 남편 아이 나 각자 하나씩 더 사 먹었다. 내친김에 딸기 맥주도 마시고 딸기 슬러쉬도 먹었다.


전통복장의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이건 난장판이다. 사람 너무 많다. 뒤늦게 합류한 친구들과 딸기 먹었음 됐다, 벗어나자, 하고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왔다.


20분 정도 마을을 벗어나 교황님의 여름 별장,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아래 위치한 알바노(albano) 호수로 향했다 오후 5시, 뜨겁던 태양이 적당히 따뜻해졌다.


호수는 낮동안 달궈져 딱 알 맞은 온도다. 나른한 풍경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어른들은 그저 늘어졌는데,  딸기 축제 내내 지쳐하던 아이들은 세상 신이 났다.


물놀이는 생각도 못하고 수영복도 챙겨 오지 않았는데, 상관없다. 알아서 탈의를 하고 아이들은 알몸으로 물에 뛰어들었다. 참 멋진 순간이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자연 속에 뛰어들 수 있는 나이는 언제까지 일까?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혁오의 톰보이 가사가 하염없이 맴돌았다.


 아.... 벌거벗은 아이 둘이 쉼 없이 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는데 찬란하다는 감정에 사로 잡혔다.
 자유롭고, 아름답고, 멋지구나.


 해가 산을 넘어가니 빛이 아직 남았는데도 바람이 차갑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차에 오른 아이가 말했다.


 _딸기 축제 매일 오면 좋겠다.


 치, 딸기보단 알몸으로 물에 뛰어든 것이 더 축제 같았겠지, 너에겐.




며칠 뒤,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과 함께 혁오의 톰보이 노래를 들었다.
 
 _너무 행복해서 불안한 거... 젊을 땐 나이테도 보이지 않고 그저 뛰어들잖아. 그날 호수에서 이안이랑 윤이가 다 벗고 뛰어드는데 너무 찬란한 거야. 멋지고, 아... 저런 게 나이테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구나, 싶었어. 행복한데 불안하지 않은 거.
 
 _행복한데 불안한 거는, 그건 정말 행복하지 않은 거야. 행복한데 불안하면 그게 정말 행복이야? 행복할 땐 행복해야지. 그러면 불행할 땐 이제 행복하겠구나, 그래? 아니야, 행복할 땐 행복이 끝날까 봐 불안하고 불행할 땐 불행이 끝나지 않을까 봐 불안할걸? 투어 하다 보면 오늘 날씨가 좋은데 내일 비 예보 때문에 계속 걱정을 하는 손님이 있어. 그냥 오늘이 좋으면 오늘을 즐겨. 내일은 생각 마. 그런데 오늘을 즐기면 다음 날 꼭 날씨가 좋더라고. 올리브 나무는 나이테가 없어. 그렇다고 올리브 나무가 인생을 몰라? 올리브 나무만큼 인생을 아는 나무가 어디 있어? 나이테가 없으니 영생을 하잖아. 행복하면 그냥 행복해.


행복하면 그냥 행복해.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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