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me di papi
Strada Bagni, 12
- (Viterbo)
거룩한 밤이 지나가고 고요한 아침이 왔다. 성탄 아침이다. 시끄러운 로마도 성탄 아침만큼은 침묵이다. 평화로운 침묵이다. 마치 모두가 여름휴가를 떠나버린 8월 중순의 로마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여름의 절정엔 로마를 떠나버려서라면 성탄의 아침은 아직 깨어나지 않아서이다. 새벽까지 가족, 친척 모두 함께 먹고 놀고 웃었다. 아침을 깨우는 건 산타의 선물에 잠을 설친 아이들의 소란이다.
우리 가족의 성탄은 자정미사로 시작한다. 성탄에는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간 아이들도 고향, 로마로 돌아온다. 처음 로마에서 만났을 땐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밀라노의 대학생활을 들려줬다. 와인도 함께 마셨다. 우리가 로마에서 지낸 시간의 깊이가 아이들을 보니 실감이 난다.
다과의 마지막 케이크는 언제나 우리가 준비한다. 2016년 성탄 자정미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양수가 터졌다. 그렇게 성탄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우리 집 둘째가 태어났다. 성탄 새벽 성당에선 아이의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이들이 선물을 뜯는 소리에 겨우 늦잠에서 깨어났다. 선물은 과연 아이들을 위한 걸까? 성탄 기분을 내고 싶은 어른을 위한 걸까? 여하튼 모두 행복하다. 그런데 창밖의 조용한 거리를 보는데 문득 서글퍼졌다. 타지에서 맞이하는 연휴에는 미묘하게 허한 기분이 맴돈다. 이 곳에서 맞이하는 내 나라의 연휴에도 이 나라의 연휴에도 어쩔 수 없이 느끼고 마는 서글품이 있다.
한국에서 성탄을 보내고 명절을 맞이한다 해도 크게 친척들 가족들 다 모여 즐길 것도 아니면서 괜히 다 가지지 못해 심통을 내는 거다. 그래도 우리에겐 두 아이가 있어 성탄다운 기운에 쌓여있구나, 고마운 아이들. 아이들은 대단하다. 존재만으로 따스함을 만든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다. 로마 근교의 비테르보라는 작은 도시에 온천이 있다. Terme dei papi, 교황의 온천이라는 뜻이다. 에투르리아인을 시작으로 로마인들에게 사랑받은 이 곳에 교황 니콜로 5세는 1450년 별장을 지었다. 그때부터 이 온천은 교황의 온천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성탄이라 특별히 야간개장을 한다고 한다. 로마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만차다. 차에서 내리자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보였다. 연말 연초에는 목욕재계를 하는 마음은 아시아인 공통인가 보다 남편과 웃었다. 온천에 몸을 담그니 몸도 마음도 녹아내렸다. 아이들에도 우리에게도 완벽한 공간이었다.
온천에 있는 사람들의 반은 외국인인듯했다. (당연히 외국인이지 ㅋㅋㅋ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닌 듯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두 이탈리아 말을 했다. 분명 우리와 같은 거다. 이 곳에서 오래 산 이방인들. 하긴, 성탄 오후에 이런 작은 도시의 온천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더 신기한 거지.
해가 져도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잔잔하게 캐럴이 흐르자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의 13번째 성탄의 밤이 수증기 위로 펼쳐졌다. 그때 산타가 번호판을 들고 등장했다. 번호판? 톰볼라(tombola)라고 하는 이탈리아 빙고다. 윷놀이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이 연말 연휴에 즐기는 게임이다. 난 처음 본 게임이었는데 아이는 학교에서 해보았다며 신이 났다. 아이에게서 내가 모르는 이탈리아를 만나게 되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다.
랜덤으로 15개의 번호가 적인 번호판을 받는다. 사회자가 번호를 하나씩 뽑아 가장 먼저 가지고 있는 번호판의 번호가 다 나온 사람이 우승이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빙고라니 사랑스러운 경험이었다. 우승자의 상품은 온천 자체 제작의 화장품 세트였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우린 집에 돌아와 톰볼라 게임을 사서 연말 연초 내내 지인들과 동료들과 가족끼리 매일 밤 톰볼라를 했다. 이거야 말로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온천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모두 뻗었다. 한국에서 명절이면 울진의 할아버지 댁에 갔다. 점심을 먹고 오후의 공식 행사는 언제나 온천이었다. 온천에 온 대부분이 타지 사람들이었다. 할머니가 가져오신 귤 음료를 마시며 온천에서 나오면 어느새 어둑어둑 해졌다. 돌아가는 길엔 언제나 잠이 들었다.
차에서 잠이 들면서 어린 시절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땐 잠이 들면 아빠가 안아줬지만 이젠 집에 도착하면 잠에서 깨어야만 한다. 나의 아이를 안아야 하니까. 집에 도착할 때 즈음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 시어머니가 너네 오늘 점심에 왜 안 왔냐고 묻더라. 나탈레(성탄) 에는 양고기 먹어야 하는데 하면서... 내년부터 나탈레 점심은 우리 시댁에서 먹어.
이탈리아는 성탄에 양고기를 먹는다. 매년 이탈리아 명절이면 친구의 시부모님은 우리 가족이 마음이 쓰인다. 잠든 아이를 남편과 한 명씩 안고 집으로 올라가면서 내년엔 친구네 시댁에 가자, 이야기한다. 양고기 먹고 톰볼라도 하자. 애들이 너무 좋아겠다. 우리가 더 신이 났다.
내 나라만큼의 명절은 아니라 해도 서글픈 마음을 무색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움이 우리 곁에 있다. 온천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따뜻해지는 방법이 세상엔 아주 많다.
written by iandos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이 매거진에는 아이들과 함께 했던 이탈리아에서의 여행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