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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25. 2020

너희가 나의 자랑이듯, 나도 너희의 자랑일 수 있기를

“나는 결혼은 안 하고, 애만 낳고 싶어.”     


언젠가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는 때이니 좀 덜하겠지만, 십오 년 전쯤이었던 그때에는 친구들 모두 화들짝 놀라며 ‘행여나 너희 엄마에게는 그런 말 하지도 마라’라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아내가 되고 싶은 로망은 없었지만, 엄마가 되고 싶은 로망은 오랫동안 가슴을 뛰게 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릴 때부터도 아기들이 너무 좋았다. 남의 아기도 이토록 예쁘고 좋은데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는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간질간질해졌다.       




다행히 엄마를 놀라게 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른둘에 결혼을 했고, 8개월 만에 첫째가 생겼다. 그때쯤 임신을 하면 이듬해 3월 출생이라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임신이 되었다. 주변에서 불임이나 난임으로 고생하는 동료들이 꽤 있었고, 임신 후 자연 유산으로 다 키운 아기를 잃은 경우도 있었는데 나에게는 너무나 쉽게 아이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돌연 불안감이 밀려왔다. 혹여나 아이를 잃을까 봐 2주에 한 번씩 돌아오던 초음파 보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태동을 느끼기 전까지는 초음파를 보지 않고서야 아이의 생사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불안함을 알았을까.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입덧으로 보여주었다. 정확히 7주부터 시작된 입덧은 20주까지 이어졌다. 거의 4개월을 악명 높은 토덧에 시달렸다. 물만 마셔도 토했고, 냉장고 문만 열어도 그 냄새를 못 견뎌 또 토했다. 떡, 뻥튀기, 아주 시원한 물, 사탕 몇 알로 연명했다. 그것도 거의 토해냈지만 일단 들어는 갔다. 몇 달을 그렇게 버티다 보니 몸이 남아날 수가 없었다. 직장에서 저혈당으로 쓰러져 난생처음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보는 진기한 경험도 했다.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으며 입덧이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뱃속 아이는 대체 뭘 먹고 자라는 건지 무럭무럭 잘 자랐다. 2주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초음파상으로 건강한 아이를 확인하는 기쁨으로 ‘이까짓 토덧쯤은!’ 하며 견디고 버텼다.


입덧이 끝나고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자 이내 살이 올랐다. 그래 봐야 워낙 살이 많이 빠졌던 터라, 원래 몸무게를 회복하는 데까지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 보니 7개월까지도 딱 붙는 옷을 입지 않는 다음에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배를 내밀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태동이 느껴지며 뱃속 아이가 세상을 향해 움직일 때마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외치고 싶었다. 마구 자랑하고 싶었다.


"지금 내 뱃속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어요!"


매일 샤워를 하며 내 몸을 바라보면 그제보다 어제가, 어제보다 오늘 배가 조금 더 나온 듯했다. 그렇게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는 것이 흐뭇했다. 남들은 임신해서 살이 틀까 걱정, 배가 너무 나와서 걱정이라는데 죽을 것 같았던 입덧 지옥을 벗어난 덕분인지 그렇게 무사히 배가 불러오는 것이 마냥 좋았다. 아주 어렵게 가진 아이도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내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나와 그 생명이 탯줄이라는 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모두 자랑스럽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24시간 진통 끝에 아이를 품에 안았다. 분만실에서만 12시간을 진통으로 몸부림쳤다. 아이가 밑으로 내려오지 않아 촉진제를 써가며 아이를 기다렸다. 정말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무통 주사 맞을 시기만 기다렸는데, 무통 주사도 효과가 없었다. 점점 잦아지는 진통이 느껴졌지만, 아이는 쉽게 세상으로 나오기를 거부했고 끝내 간호사가 내 위에 올라타 배 위에서 아이를 밀어내야 했다. 그렇게 생애 처음 겪는 잔인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 힘주기를 했고, 내 몸속에서 무언가가 쑤욱하고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 아빠가 탯줄을 자르고 아이를 간단히 씻겨 속싸개에 싼 뒤, 내 품에 안겨주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첫 느낌은 물컹한 살덩이를 안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이의 몸 어디에도 모나게 느껴지는 곳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내 아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내 품에 처음 안긴 아이는 살포시 눈을 뜨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때 느꼈다.       


‘드디어 엄마가 되었구나. 이 작은 생명이, 나의 아이로 와주었구나.’     


입덧 지옥과 불면을 밤을 넘어 무사히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사히 어두운 뱃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와준 아이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아이는 잘 먹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작았던 아이는 쉽게 크지 않았다. 아이가 먹지 않는 순간마다 애가 탔다. 그러다 어쩌다 한 번, 타 준 분유 한 병을 다 먹으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특했다. 친정엄마와 신랑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사랑이가 방금 분유 한 병을 다 먹었다며 자랑을 했다. 깨끗하게 비워낸 분유병을 인증샷으로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랑이는 90일에 뒤집기를 했고 차례차례 재주가 늘어났다. 되짚고 잡고 서고, 혼자 앉고, 손을 놓고 서고, 혼자 걸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 박수를 치고, 죔죔을 하고, 도리도리를 하고,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모든 처음의 순간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남겼다.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그런 아이를 자랑하고 싶었다. 저도 처음이었겠지만, 나도 처음인 순간들이었다. 엄마로서 처음 맞이하는 모든 순간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경이롭긴 했다. 힘들었지만 자랑스럽기도 했다. 아이를 한 팔에 끼고 외출을 하면, 명품백을 매고 나간 것보다 더 뿌듯했다.

           



첫째가 15개월쯤 되었을 때 감사하게도 둘째가 찾아왔다. 둘째는 혹여나 아닐까 봐 입 밖으로 꺼내놓지도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바라던, 딸이었다. 딸이 낳고 싶어서 둘째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둘째가 딸이었으면 바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둘째도 입덧이 심해 수액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32주부터는 조기진통이 오기 시작해서 꼼짝없이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 그런데 조기진통이 무색하게 예정일을 지나도 자궁문이 열리질 않아서 결국에는 유도분만을 해야 했다. 덕분에 첫째 때만큼 긴 시간 진통은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6시간 정도 사지가 뒤틀리는 진통 끝에 아이를 안았다. 생애 처음이었던 첫째 때의 느낌과 달리, 마지막이라는 데서 오는 둘째만의 뭉클함이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애둘맘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둘째는 첫째보다 모든 것이 더 빨랐고, 특유의 애교가 넘쳐났다. 눈웃음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만큼 사랑스러웠다. 여자아이들에게서 더 뛰어나게 드러난다는 공감 능력에 감탄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과자 하나를 쥐어 줘도 “엄마, 아빠, 오빠”를 순서대로 부르며 챙기는 모습을 사랑하지 않을 재주가 없었다.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수시로 친정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둘째의 사랑스러움을 마음껏 보여드렸다. 엄마는 자주 감탄하며 ‘대단한 딸을 낳았다’고 나를 추켜세워주었다. 재주는 딸이 부리는데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의 임신과 출산으로 몸에는 여기저기 적신호가 켜졌다. 복압성 방광염, 질염은 잊을 만하면 재발했고(이제는 그냥 인생의 동반자로 평생 함께 가야 할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깨와 허리, 손목과 무릎은 틈만 나면 욱신거려 파스와 한 몸으로 사는 게 익숙해졌다. 두 번의 입덧 모두 지긋지긋하게 토했던 탓에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은 만성질환으로 남았다. 엄마가 된 대가가 적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나의 자랑이었다.


'내가 이렇게 예쁜 아가들을 낳았다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고?'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서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다. ‘누구든 다 덤벼라, 덤벼. 내가 다 상대해주마.’ 이해할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의 자랑, 너희 둘.


아이들은 나의 가장 큰 자랑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 안에서 언제나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 조금 부족한 면이 있을지라도, 아쉬운 면이 있을지라도 나에게만은 언제나 최고의 자랑거리일 것이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 당연한 일조차도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이니 말이다.      


아이들이 내게 찾아온 그 순간부터 나의 자랑이었듯, 언젠가는 나도 아이들에게 자랑이 되고 싶다. 어떤 순간에도 내어놓고 말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엄마이고 싶다. 배우고 싶고, 본받고 싶고, 존경할 만한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그 바람은 내 앞날에 남은 수많은 꿈 중에 가장 이루기 어렵겠지만, 반드시 이뤄내고 싶은 가장 중요한 꿈이다.           


열심히 살다 보면, 꿈은 이루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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