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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Sep 13. 2020

긍정과 감사의 태도를 보여주신, 모지스 할머니를 만나다

스무 번째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애나메리로버트슨모지스)

처음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만난 건 『그림의 힘』이라는 책에서였다.

그림의 힘(172쪽)

그림의 첫인상은 ‘풍요롭다’였다. 화폭의 빈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번잡함보다 풍요로움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인물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림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행복으로 미소 짓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림을 다시 만났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라는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를 다룬 책에서 말이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는 모지스 할머니의 일기장이다. 처음 책 제목을 보고는 아마도 할머니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에세이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76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100세에 세계적인 화가가 된 모지스 할머니, 모두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은 틀렸다. 이 책은 할머니의 회고록이자, 일기장이었다. 아주 담담한 문체로 그저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할머니가 우리를 앞에 앉혀놓고 자신의 세월을 이야기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 부모님과의 기억, 어린 시절의 추억, 형제자매들에 대한 기억, 결혼, 출산, 육아, 집안일, 이웃, 이사 등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솔직하게 담겨있었다.      


모지스 할머니의 삶을 보며 어쩌면 이토록 긍정적이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셨을까, 감탄하고 감동했다. 여성에게 그렇게 관대하지 않던 시절을 사시면서도 언제나 스스로의 생을 살고 싶어 하셨던 할머니의 삶에서는 존경심마저 들었다.      



어찌 됐든 이게 바로 나의 감자 칩 사업이었어요. 나는 늘 내 힘으로 살고 싶었지요. 가만히 앉아 토마스가 주는 돈을 타 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지붕을 타고 올라가던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165~166쪽)     

내가 만약 그림을 안 그렸다면 아마 닭을 키웠을 거예요. 지금도 닭은 키울 수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누군가 날 도와주겠거니 기다리고 있진 못해요. 주위 사람들에게도 여러 번 말했지만, 남에게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도시 한 귀퉁이에 방을 하나 구해서 팬케이크라도 구워 팔겠어요. 오직 팬케이크와 시럽뿐이겠지만요. 간단한 아침 식사처럼 말이에요.(272쪽)     



모지스 할머니가 남편이 벌어주는 돈을 타 쓰며 살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은 결코 남편과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지스 할머니는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 남편 덕분이었다고 말할 만큼 남편을 신뢰했고 사랑했다. 모지스 할머니는 결혼 생활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두 인격체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부부는 한 팀이라고 생각했기에 남편과 자신은 동등하게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부의 문제를 떠나, 모지스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한 개인이었다.      



내 나이 열둘에 밥벌이를 하려고, 소위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나에겐 요리와 살림, 예의범절, 세상을 배울 좋은 기회였지요. 토마스 화이트 사이드 부부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나이 지긋한 좋은 분들이었어요. (68쪽)     

예배를 마치고 애벗 씨가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줄 때 그해 들어 처음으로 썰매를 탔습니다. 참 근사했어요. 썰매를 타고 종소리를 들으며 신나게 달렸고, 집에 돌아와 보니 불을 지펴두어서 따듯하고 포근했어요. 그러니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게 당연하겠지요.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74쪽)     

하루에 세 차례 우유를 휘젓기가 너무 힘들어서 버터 제조용 들통을 하나 주문했습니다. 들통으로 버터를 만드는 건 힘이 많이 들긴 해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 일을 하면서 멀리 골짜기를 내려다볼 수도 있었고 기차가 지나갈 때면 블루리지 산맥을 배경으로 증기가 뭉게뭉게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도 있었지요. 그때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흰색과 회색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131쪽)     



가족들과 헤어져 식모살이를 하러 가면서도 이전까지 배울 수 없던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하는 모지스 할머니, 우물까지 난 길에 눈이 쌓여 온종일 눈을 치우느라 고생을 하고도 그 길을 따라 썰매를 타고 오며 감사함을 느끼는 모지스 할머니, 우유를 휘젓는 고된 일을 하루 세 번씩 해내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모지스 할머니, 그의 삶은 그 시대 여성들이 흔히 지나가는 평범한 궤적을 따라갔으나 삶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너무나 특별했다. 살면서 대면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에도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고, 도리어 감사한 순간을 찾아냈다.     


76살의 나이에 더 이상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되자 붓을 들고 자신만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린 모지스 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한 교과서였다. 잔잔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읽는다기보다는 듣는다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지스 할머니의 삶에서도 형제자매 혹은 자신의 아이들을 잃은 상실의 슬픔이 존재했고,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좌절할 순간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모지스 할머니는 그것을 슬픔과 좌절로 받아들여 주저앉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했으며 주변의 더 아픈 사람들을 가만히 안아주는 넓은 품을 보였다. 그 당시에야 왜 안 슬프고, 왜 괴롭지 않았겠냐마는 그 일들이 의 삶을 송두리째 불행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그런 태도로 살아왔기에 모두가 늦었다고 말하는, 아니 그냥 늦은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늦었다고 말할 만한 나이에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정말 발전하고 있는지 때로는 의문이 듭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달랐어요. 지금보다는 여러모로 더 느린 삶이었지만 그래로 행복하고 좋은 시절이었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삶을 더 즐겼고, 더 행복해했어요. 요즘엔 다들 행복할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략)
내 삶의 스케치를 매일 조금씩 그려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돌아보며 그저 생각나는 대로,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썼어요.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지요. 다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일들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하루 일과를 돌아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쳤고 내가 이룬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 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275쪽)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면서, 정작 곁에 있는 행복은 눈치챌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모지스 할머니가 남긴 말은 울림이 크다. 나 역시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소소한 행복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긴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언제나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에 급급해서 아주 귀한 순간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곤 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결국에는 다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일이며, 그 일들을 잘 버무려 하나의 생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나’의 일이다. 내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마음에 남길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다.      




눈을 감은 채, 먼 곳의 할머니가 가만가만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내 삶은 내가 만드는 것이니 조금 더 긍정적으로, 조금 더 감사한 마음으로 내 삶을 예쁘게 그려나가야겠다. 나도 모지스 할머니처럼 생의 끝자락에서 내 삶은 최고의 삶이었고,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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