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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Sep 20. 2020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스물한 번째 시간-『가재가 노래하는 곳』(델리아 오언스)

제목만으로 내용이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새의 깃털을 한 손에 든 채로, 그것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홀로 서있는 한 소녀의 실루엣이 담긴 표지와 제목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 있을까. 숱한 호기심을 품은 채 책을 펼쳤다.

책은 차례보다 먼저 지도 하나를 보여 주며 시작되고 있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이 지도 속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리라 짐작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도에서 마을과 동떨어진 ‘카야의 판잣집’이 읽는 내내 마음을 콕콕 찔렀다.     




여섯 살의 나이에 마을과 한참 떨어진 습지의 오두막에서 혼자 살아가게 된 카야, 그에게도 분명 가족이 있었지만 가정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엄마를 시작으로 오빠 둘, 언니 둘, 아버지까지 모두 카야 곁을 떠났다. 기댈 곳이라고는 오직 습지와 오두막집뿐인 카야는 대지를 엄마 삼고 자연을 학교 삼아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여섯 살 꼬마 아이가 살기 위해 부엌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아내고, 사위가 어둠으로 둘러싸이자 두려움에 떨며 잠드는 모습이 두 아이의 엄마로서 너무나 애처롭고 가엾었다.          


카야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허기에 놀랐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허기. 부엌으로 가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언제나 빵을 굽고 강낭콩을 삶고 생선 스튜를 보글보글 끓이는 열기에 뜨거웠던 방이었는데, 이제 부엌은 퀴퀴하고 고요하고 어두웠다. “이제 밥은 누가 해?”카야는 소리 내어 물었다. 사실 ‘이제 누가 춤을 추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촛불을 켜고 화덕의 뜨거운 잿더미를 쑤시며 불쏘시개를 넣었다. 불이 피어오를 때까지 풀무질을 했다. 판잣집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냉장고가 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곰팡이가 끼지 않도록 문에 파리채를 끼워 살짝 열어두었다. 그래도 틈새마다 검푸른 곰팡이가 피었다.

먹다 남은 음식을 꺼내며 카야는 말했다. “그리츠를 돼지기름에 튀겨서 데워야지.” 음식을 냄비째 그대로 먹고 창밖을 살피며 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초승달이 발한 빛이 판잣집에 닿자 카야는 포치에 있는 잠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울퉁불퉁한 매트리스에는 엄마가 알뜰시장에서 사준 파란 꽃무늬 홑청이 덮여 있었다. 평생 혼자 맞는 밤이었다.

처음에는 숲 속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앉아 차양문 밖을 살폈다. 한 그루 한 그루 모양을 낱낱이 아는데도 이따금 나무가 달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참 침도 못 삼키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때마침 청개구리와 여치가 친숙한 노랫소리로 밤을 채워주었다. 어둠은 달콤한 향내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럽게 뜨거운 낮을 하루 더 견뎌낸 개구리와 도마뱀들의 텁텁한 숨결, 습지가 낮게 깔린 안개로 바짝 다가왔고 카야는 그 품에서 잠이 들었다. (25~26쪽)    



카야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혼자가 된 카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습지의 오두막에서 혼자만의 삶을 살아간다. 테이트를 만나기 전까지.


카야의 넷째 오빠이자 카야와 가장 살갑게 지냈던 조디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테이트를 우연히 습지에서 만난 후로 카야의 마음에는 테이트가 깊이 각인된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먼발치에서 만나면 숨어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말을 걸지도 못하던 카야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오두막 앞 나무 등걸에 아름다운 새의 깃털을 꽂아 놓고 가는 소년이 테이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연이 닿고, 테이트가 카야에게 한글과 숫자를 가르쳐주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테이트는 습지에 관심이 많은 소년으로, 습지에서 나고 자라 습지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카야에게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다수의 마을 사람들이 카야를 '마시 걸(습지 소녀)'이라 부르며 배척하던 것과 다르게 테이트는 있는 그대로의 카야를 사랑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10대의 사랑답게 풋풋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테이트가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카야는 힘없이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기에 모두가 떠나버리는 걸까 생각했다. 친엄마, 언니들, 온 가족, 조디 그리고 이제 테이트까지. 카야에게 가장 아린 기억은 오솔길을 따라 하나씩 사라지는 가족들이었다. 하얀 스카프 끝자락이 잎사귀 사이로 날리고, 바닥 매트리스에 남아 있던 양말 더미.

테이트와 삶과 사랑은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테이트가 없다.(182쪽)          



카야에게 테이트는 그저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었다. 카야에게는 존재의 이유이자, 유일하게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존재였다. 카야는 습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마을에서 살지 않는다는 고작 그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제된 삶을 살았다. (유일하게 혼자 남은 카야를 도와준 사람들은 점핑 부부였다. 그들 역시도 백인들에게 배제당하는 흑인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을 지켜주던 부모와 형제자매들 모두가 카야를 버렸고,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한 연인조차 카야를 떠났다. 언제나 남겨지는 쪽이었던 카야는 테이트와의 이별을 겪으며 더 이상 누구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지점에서 마음이 너무나 저렸던 것은 카야는 단 한 번도, 단 한 사람에게도 상처를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사랑하고, 기다리던 카야는 언제나 남겨지고 버림받았다.


그럼에도 카야가 생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습지라는 거대한 자연의 품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야는 습지를 탐구하고, 습지 속에 살아 있는 존재들과 교감하며 생을 견뎠다. 외로움과 싸우고 두려움과 맞섰다. 그렇게 카야는 습지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타인과 아무런 교류를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근원적인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 기다릴 존재가 없다는 것, 사랑을 나눌 존재가 없다는 것은 카야를 외로움의 늪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카야는  마시 걸을 제 것으로 삼고 싶어 하는 체이스에게 눈길을 주되었다. 체이스는 테이트와 결이 달랐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살아가며, 무성한 소문으로 둘러싸인 카야를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리고 카야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 싶어 다.


결국 카야는 자신과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체이스에게 몸과 마음을 외로움을 다 내어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끝내 체이스는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고 카야는 다시 한번 처절하게 버림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체이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망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카야가 체포되고, 소설 후반부는 카야에 대한 재판 장면이 주를 이루었다.


카야의 재판은 배심원 재판으로 이루어지는데, 배심원들 중 다수가 카야에 대한 뜬소문을 믿으며 만난 적도 없는 카야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카야의 변호를 자처한 변호사 톰은 바클리코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카야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사실적 증거로만 사건을 바라보며 카야를 돕고자 했다. 여러 증인에 대한 심문을 끝낸 뒤 이어지는 톰의 최후 변론이 아주 인상 깊었다.


톰의 변론은 아무 준비 없던 나에게까지 툭, 하고 아주 무거운 질문 하나를 던져주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변론이 서술된 페이지에 머물러야 했다.


“배심원석에 앉아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바클리코브에서 성장했고 지금보다 젊었을 때 마시 걸에 대한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녀를 마시 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요. 어떤 이들은 마시 걸은 반인 반늑대라고 속삭였고,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사슬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안광을 발한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유기되어 혼자 늪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살아남은 어린 소녀를, 우리는 돕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 점핑을 제외하면 우리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 어떤 집단도 그녀에게 음식이나 옷가지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녀에게 늪지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와 달라진 건가요? 우리가 일원으로 받아주었다면, 지금 그녀는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해주었다면, 우리 교회와 집에 초대했다면, 그녀를 향한 편견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범인으로 기소되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이 수줍은 외톨이 처녀를 재판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사건에서, 이 법정에서 제시된 사실을 근거로 판단해야 합니다. 루머나 지난 24년간 쌓인 감정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참되고 견고한 사실이 무엇이냐고요?(420쪽~421쪽)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클라크(카야)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가 달라진 건가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다름’을 경계하고 ‘다름’에 배타적이다. 그 과정에서 다수자와 소수자의 개념이 생겼고, 소수자는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기 어려워졌다. 다수는 옳고, 소수는 그른가. ‘다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언제나 선한가. 대답 대신 여러 질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교과서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지 않은 답이었다. 삶은 교과서와 달랐고, 나는 교과서적인 답과 때로는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웠다.




추리적 요소가 있어서 이후의 줄거리를 모두 서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흡입력이 뛰어난 소설이었다. 1950년~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2020년 우리의 모습이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인종 차별, 성 차별, 가정 폭력, 성폭력, 가족 파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 등이 여러 사건들을 통해 다층적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읽는 내내 아팠고, 자주 눈물이 났다.          


나는 여성이자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소수자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안정된 직장을 갖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다수자의 삶으로 이적했다. 나의 사고 체계 안에는 소수자의 면모가 남아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다수자로서 사고하며 살고 있다. 고백컨데 스스로 그 변화를 ‘다행’이라 여기며 살았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생각,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이 덜한 직업을 가졌다는 것에서 '다행스럽다'는 단어를 떠올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지난 삶의 순간순간에 알게 모르게 나와 다른 소수자들을 경계하고 배제해왔을 것이 뻔했다. 내 앞에서 여섯 살의 카야와, 열두 살의 카야, 스물네 살의 카야를 마주한다면 나는 과연 그에게 선뜻 손 내밀어줄 수 있는가. 대답에 자신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카야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며 현실 세계의 카야들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 어린 형제가 배고픔에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불이 나 전신에 큰 화상을 입은 일이 불쑥 떠올랐다. 우리의 무관심, 아니 어쩌면 무관심을 가장한 암묵적인 ‘배제’ 속에서 수많은 카야들이 오늘도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했다. 습지까지 갈 것도 없었다. 올려다 보기도 까마득한 고층 아파트들 뒤편, 그늘진 곳의 주택가와 원룸가에만 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애써 알려하지 않는 카야들이 존재했다.     


라면 형제의 사건 이후 그들을 돕고자 하는 모금 운동이 일어나고,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통신비 2만 원을 보이콧하며 그 돈으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고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주변을 돌아보는 한 발 늦은 걸음이 늘 아쉽지만, 벌어진 이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백 번 천 번 낫다. 나도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할 때이다.          




최근에 읽는 책마다 나에게 답하기 어려운, 무거운 질문들을 남긴다. 어쩌면 그런 책들을 자꾸만 만나게 되는 것이 내 삶에서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갈 시기가 와서 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남기는 책은 좋은 책이다. 적어도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책을 읽기 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테니까.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카야들을 떠올리며, 그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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