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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Oct 04. 2020

철학하는 엄마를 꿈꾸며

스물두 번째 시간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이진민)     

언젠가부터 육아서를 읽지 않는다. 첫째를 임신했던 때부터 첫째가 돌이 될 즈음까지는 읽는 책의 삼분의 일쯤이 육아서였다. 처음이라 막막하고 두렵던 육아의 순간순간마다 길잡이가 될만한 책들을 찾아 읽었다. 종류도 어찌나 많던지, 방송에 자주 나오는 육아 전문가들이 쓴 책을 골라 읽기도 하고, 제목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들을 읽기도 하면서 육아에서 만난 막다른 길을 벗어나려 애쓰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육아서를 읽을수록 마음 한 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육아서를 읽다 보면 ‘엄마는 신이 되라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물론 구절구절 다 맞는 말이긴 지만, 그 책대로라면 내가 너무 형편없는 엄마로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그런 말을 하고자 한 책들이 아니었겠지만 엄마로서 너무나 미숙했던 그때의 나는 책의 구절구절을 내게로 향하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꼈다. 그때부터 더 이상 육아서를 사지도, 읽지도 않았다.


그 대신 인문학 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책들을 읽고 있자면 육아서를 읽지 않아도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내 아이가 바른 인성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직접적인 해답은 얻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더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작년도 브런치 북 대상 수상작인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이진민)를 만났다.     

 



제목이 마음에 먼저 와 닿았다. ‘철학하는 엄마’라니. 대학 때 철학 수업을 몇 개 찾아 들은 적이 있고, 교직을 준비하며 교육철학을 아주 재미있게 공부했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철학자 강신주 님께 빠져서 그분의 책을 일일이 찾아 읽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철학 관련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여 육아에 뛰어들면서부터였다. 아이를 보며 짬짬이 책을 읽는 내게 ‘철학’이라는 소재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았다.


저자는 책의 부제에서 ‘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나를 두드리는 사유’라는 표현과 함께 ‘진짜 철학이 필요한 순간은 엄마가 되던 그날부터였다(세상의 빈약한 선택지 앞에서 조마조마한 엄마들에게)’라는 표현을 써두었다. 궁금했다. ‘엄마’라는,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저자가 아이를 통해서 어떤 철학을 만났을지, 그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나와 같은 세상 앞에 조마조마한 엄마들에게 어떤 다정한 말을 건네줄지.               




엄마라는 역할을 짊어진, 누구라도 겪을 만한 일들을 이토록 위트 있게 표현해 낸 작가의 필력에 놀랐다. 낮잠 자는 아이 옆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도 조심해가며 책을 읽다가 몇 번이고 아이의 잠을 깨울 뻔했는지 모른다. 정말 너무 재밌었다! 표현들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바다에 던져 놓은 그물로 막 건져 올린 오징어 떼들이 날뛰는 것 같았다. 같은 책을 20개월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친동생에게도 선물했는데 동생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밑줄 그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저자와 내가 동일 인물인가? 내 얘기를 가져다 쓴 걸까?'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질 만큼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다. 아마 내가 아닌 대부분의 '엄마'들이 모두 그럴 것이다.

그냥 넘어갈 페이지가 별로 없을 정도로 공감하며 읽었다


어떤 부분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볼까 밑줄 긋고 지나갔던 부분들을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고심끝에 골라낸 부분은 내게 가장 신선한 시선으로 다가온 '수유'에 대한 이야기와 요즘 내 고민에 맞닿아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부분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가장 민망한 부분이 남았으니 이름하여 유.축.기. 이 망할 놈의 기계가 최고였다. 기계가 가슴을 쥐어짜니 아프기도 더럽게 아플뿐더러, 이 비주얼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요상한 것들이 내 가슴에 달려 펌프질을 하고 있을 때면 이 민망한 장면을 견딜 수 없어 내게서 홀연히 빠져나가려는 멘털을 잘 붙잡아야 했다. (69쪽 수유:나는 가슴이 달린 채 존재한다. 고로? 中)     


출산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수유의 고통 또한 어마어마했다. 안 낳아본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나면 모유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줄 알고, 나오는 모유는 그냥 아이에게 먹이면 되는 줄 안다. 또 모유가 적게 나오면 분유를 먹이면 되는 줄 알고. 나 역시도 그랬다. 출산 직전까지도, 아니 직후까지도 그랬다.


모유 수유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경우에는 내 배에서 열 달을 키워 세상에 내어놓은 아이에게 내 젖을 물리고 싶은 욕망이 이상하리만치 강렬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됐다. 양도 적었지만 작게 태어난 아이는 잘 먹지 못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아예 안 나왔음 싶은데 그게 또 내 맘 같지 않아서 일정량이 계속해서 가슴에 차올랐다. 유.축.기. 정말 두 번 다시 쳐다도 보고 싶지 않은 그 ‘요상한 것’을 결국 둘째 때까지 가슴에 달고 몇 달을 살면서 나는 내가 인간이 아닌 젖소가 되었다는 생각에 때론 웃고 때론 울었다. 그 생각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저자의 서술을 읽는 순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으면서도 그냥 웃어버렸다.



거 그냥 가려두지 가슴을 꼭 해방시켜야 하겠나, 묻는다면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똑같이 거 그냥 가려두지 다리가 꼭 해방되어야 하겠나, 하고 묻지 않았을까. 아니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다리(leg)’라는 음란한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피아노 다리를 피아노 다리라 부르지 못하고, 디너 테이블에서도 ‘chicken leg’나 ‘chicken thigh’ 대신 ‘drumstick, dark meat’라는 말을 써야 했으며, 다리를 벌리고 앉을 수 없어서 여성이 첼로를 배울 수 없었던 그 시기. 지금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미니스커트를 입는다고 경찰이 무릎 위로 자를 들이대던 시절을 우리는 자유와 개성이 억압받던 시절로 기억한다.
(73쪽 수유, 나는 가슴이 달린 채 존재한다. 고로? : 젖을 물린 채 가슴 해방 운동에 대해 생각하다)     



이 책이 진짜 좋았던 이유는 공감할 만한 육아의 순간을 위트 있게 표현해낸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표현 아래에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들이 전혀 어렵지 않게 또 낯설지 않게 꾹꾹 눌러 담겨 있어서였다. 저자는 내가 겪었던 그 지긋지긋한 모유 수유 적응기를 거치며 ‘가슴 해방 운동’에 대해 생각했다. 모유 수유라면 치를 떨 만큼,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던 내게 저자의 시선은 신선했다. 그 버거운 시간들을 겪으며 ‘가슴 해방 운동’을 생각하다니. 나는 내 가슴 하나도 감당을 못해서 전전긍긍했던 시간이었는데... 이래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건가 싶었다. 엄마가 된 이상 누구나 겪어가는 시간들을 철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니 또 다른 장면들이 보였다.           




우리 사회에 이토록 혐오의 정서가 짙게 깔린 데에는, 작은 땅덩어리에 모여 살면서 비교하기 좋아하는 습성이 크게 한몫하는 것 같다.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해지는데, 위는 아래와 끊임없이 격차를 벌리고 싶어 한다. 그 와중에 위는 아래를, 아래는 위를 혐오하고 있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본다.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좁은 땅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비교를 습관화했고, 끊임없이 격차를 벌리려고 했고, 그 결과 혐오가 가득한 사회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내가 1등인 사회, 그렇지만 혐오가 가득한 비정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내 아이가 최상위 계급에서 다른 모든 아이들을 발밑에 두고 그들과의 격차를 한없이 벌렸으면 하는 그런 부모들이 있다면, 루소를 한 번 떠올려 보면 좋겠다. 그런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아이를 파괴하는 악순환이 될 뿐이라는 루소의 말을.(180쪽 남의 아이와 비교하기 : 클레의 그림으로 루소를 읽다 中)


나 역시도 아이들을 키우며 사회에 대해 조금 더 날 선 시선을 갖게 된 엄마 중 한 사람이다. 별생각 없이 내 인생 하나만 잘 살기도 급급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육아에 매진하면 할수록 내 아이를 내어놓을 세상이 걱정스러웠다. 


 '비교, 경쟁, 혐오, 낙오, 지배'와 같은 단어들이 수면 위로 둥둥 떠다니는 세상에 아이들을 내어놓아야 한다니.  단 한 번도 최상위 계급으로 살아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살게 될 가능성이 제로인 내게서 태어난, 나의 꽃 같은 두 아이가 세상에 던져져 그 경쟁과 갈등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내가 무슨 수를 쓴다해도 이 걱정스러운 사회를 통째로 바꿀 재주는 없다. 적어도 나의 두 아이가 누군가를 밟고 서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지는 않기를, 누군가와의 격차를 벌리려 발버둥 치는 삶을 살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는 것, 제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해주는 것, 그래서 다른 누구도 그렇게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것, 그게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본다.


임신의 경험에서 플라톤의 동굴을,
출산의 경험에서 사르트르와 하이데거, 아렌트의 시작을,
나를 내려놓고 오로지 엄마로서 사는 삶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론을,
아이와 첫 분리를 통해 홉스의 분리 불안을,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세상에서 루소와 맹자와 시몬 베유의 사회에 대한 시선을,
아이를 통해 배우며 니체의 철학을          


임신과 출산, 육아의 순간에서 만나는 여러 장면들에 철학적 사유가 더해진 글을 읽어가며, 엄마로 사는 삶에 왜 철학이 필요한지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가 보여준 ‘철학’은 줄 그으며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나에게 ‘철학하는 엄마’란,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시선을 지닌 엄마'로 읽혔다. 엄마의 세계가 흔들리면 아이의 세계는 자동으로 흔들린다. 엄마가 된 이상 그냥 대충 되는 대로 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엄마의 시선은 다양해야 하고, 바른 곳을 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엄마는 정말로, ‘철학’을 해야 했다.      




단순하게는 몰랐던 철학자들에 대해서 새롭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나아가 분명히 나도 고 지나온 육아의 징검다리를 조금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며 건너온, 선배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또 나 역시 소중하게 글로 또 사진으로 담아두었던 육아의 순간순간들을 철학적 사유가 더해진 서술로 읽으니, 그 순간들이 더 귀하고 따뜻하게 느껴져 감사했다.     


예비엄마들을 비롯해 현재 육아에 매진하고 있는 모든 엄마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아이 키우기’, ‘~아이 키우는 법’이라는 육아 실용서에 내 아이를 끼워 맞추려 애쓰기보다 우리가 좀 더 단단한 엄마가 되어보자고, 우리가 조금 더 넓고 다양한 시선으로 아이를 또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철학하는 엄마’가 되어보자고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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