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째 시간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이진민)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가장 민망한 부분이 남았으니 이름하여 유.축.기. 이 망할 놈의 기계가 최고였다. 기계가 가슴을 쥐어짜니 아프기도 더럽게 아플뿐더러, 이 비주얼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요상한 것들이 내 가슴에 달려 펌프질을 하고 있을 때면 이 민망한 장면을 견딜 수 없어 내게서 홀연히 빠져나가려는 멘털을 잘 붙잡아야 했다. (69쪽 수유:나는 가슴이 달린 채 존재한다. 고로? 中)
거 그냥 가려두지 가슴을 꼭 해방시켜야 하겠나, 묻는다면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똑같이 거 그냥 가려두지 다리가 꼭 해방되어야 하겠나, 하고 묻지 않았을까. 아니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다리(leg)’라는 음란한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피아노 다리를 피아노 다리라 부르지 못하고, 디너 테이블에서도 ‘chicken leg’나 ‘chicken thigh’ 대신 ‘drumstick, dark meat’라는 말을 써야 했으며, 다리를 벌리고 앉을 수 없어서 여성이 첼로를 배울 수 없었던 그 시기. 지금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미니스커트를 입는다고 경찰이 무릎 위로 자를 들이대던 시절을 우리는 자유와 개성이 억압받던 시절로 기억한다.
(73쪽 수유, 나는 가슴이 달린 채 존재한다. 고로? : 젖을 물린 채 가슴 해방 운동에 대해 생각하다)
우리 사회에 이토록 혐오의 정서가 짙게 깔린 데에는, 작은 땅덩어리에 모여 살면서 비교하기 좋아하는 습성이 크게 한몫하는 것 같다.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해지는데, 위는 아래와 끊임없이 격차를 벌리고 싶어 한다. 그 와중에 위는 아래를, 아래는 위를 혐오하고 있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본다.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좁은 땅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비교를 습관화했고, 끊임없이 격차를 벌리려고 했고, 그 결과 혐오가 가득한 사회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내가 1등인 사회, 그렇지만 혐오가 가득한 비정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내 아이가 최상위 계급에서 다른 모든 아이들을 발밑에 두고 그들과의 격차를 한없이 벌렸으면 하는 그런 부모들이 있다면, 루소를 한 번 떠올려 보면 좋겠다. 그런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아이를 파괴하는 악순환이 될 뿐이라는 루소의 말을.(180쪽 남의 아이와 비교하기 : 클레의 그림으로 루소를 읽다 中)
임신의 경험에서 플라톤의 동굴을,
출산의 경험에서 사르트르와 하이데거, 아렌트의 시작을,
나를 내려놓고 오로지 엄마로서 사는 삶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론을,
아이와 첫 분리를 통해 홉스의 분리 불안을,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세상에서 루소와 맹자와 시몬 베유의 사회에 대한 시선을,
아이를 통해 배우며 니체의 철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