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같은 건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겠지만

by 진아

아이들과 산책을 갔다 오는 길에 모과나무를 발견했다. 거의 매일같이 지나다니던 길이었는데, 모과나무에 열매가 매달리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모과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우와, 얘들아. 이게 모과라는 열매야.”

“먹는 거예요?”

“아니, 사과처럼 그냥 먹는 과일은 아니고, 향기가 좋아.”

“맡아볼래요!!”


아이들은 타고 있던 킥보드와 유모차에서 내려서는 모과 향기를 맡아보겠다고 성화였다. 하지만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열매를 따줄 수는 없었다.


“얘들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엄마가 일부러 따줄 수는 없어. 그러니까 우리 바닥에 떨어진 게 있는지 찾아보자!”


아이들의 탐험가적 본능이 바로 발동되었다. 아이들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에 불을 켜고는 모과나무 아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채 익지 않아 싱그러운 초록빛의 모과가 떨어져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최근에는 비바람도 분 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떨어질 일은 거의 없는 듯했다). 정말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반대편에도 제법 큰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밑까지 샅샅이 둘러보아도 없었다. 아이들의 눈에 실망감이 비쳤다.


“얘들아, 여기 있다!”


모과나무 아래에 있던, 자산홍 잎사귀들 안쪽으로 여기저기 찍힐 대로 찍힌 초록빛 모과 하나를 발견했다. 손수건으로 흙과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고는 내가 먼저 코를 킁킁 대보았다. 노랗게 잘 익은 모과의 향기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모과 향기였다. 아이들은 향기를 맡고 선 나를 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서로 먼저 코를 대 보려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막상 향기를 맡아본 아이들은 조금 낯선 향기였는지 이상하다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래 놓고는 또 향기가 나는 열매가 신기했던지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모과 하나를 얼떨결에 집에 데리고 왔다.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는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손 세정제로 저희들 손 대신에 모과의 구석구석을 씻겨주었다. 저녁때 퇴근한 아빠를 보자마자 자기들이 씻긴(?) 모과라며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향기 한 번 맡아보라고 방방 뛰는 통에 신랑은 몇 번이나 모과를 코 끝에 대고 킁킁거려야 했다.

어쩌다 이렇게 흠집이 생긴 걸까. 그나저나 반질반질 깨끗이도 씻었네.



어린 두 아이는 아직 인간보다 자연에 관심이 더 많은 시기라 어디서든 망설임 없이 주저앉아 흙을 파고, 모래를 뿌리며 논다. 나무와 꽃만 만나면 잎사귀와 꽃잎을 뜯으려는 통에 나무도 아프니까 그러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고 주의를 주기 바쁘다.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어서 가져와서는 소중한 보석 인양 잘 씻어 보관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졸졸 쫓아가기도 한다. 나무에 쳐져 있는 거미줄을 걷어버리거나, 쫓아오는 벌을 도리어 쫓아가서 나를 식겁하게도 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연과의 어울림에 거부감이 없고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저희들을 둘러싼 세계, 자연에 대한 관심을 오래도록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조금 더 오래, 소중하게 그 마음을 간직해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지나가다 만난 식물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요즘은 워낙 검색 엔진이 좋아서 처음 보는 꽃도 사진 한 번만 찍어 검색 버튼을 누르면 꽃 이름과 꽃말, 특성이 주르륵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며 처음 보는 꽃과 나무들을 찾아 검색을 한 뒤 이름을 알아가는 것은 내게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이름을 알려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태반이지만(물론 나도 그렇고), 그래도 한 번 그 앞에 머무르며 이름을 찾아보았던 식물들은 아주 특별한 존재로 기억하는 듯했다. 그러다 몇 번쯤 반복적으로 마주친 식물들은 “엄마! 저거 민들레 잎이잖아. 저건 자산홍이고, 이건 감나무잖아. 저건 배롱나무다!”라며 저희가 먼저 이름을 불러주며 반가워했다.

또 하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계절감이 있는 꽃들을 집에 들여놓았다. 초봄에는 프리지어를, 늦봄엔 장미를, 여름의 초입엔 수국을, 한여름에는 해바라기를, 가을에는 소국을……. 어떤 건 한두 단 정도만 사다가 작은 꽃병에 꽂아 식탁 위에 두기도 하고, 어떤 건 화분으로 사와 베란다에 두기도 했다. 아이들은 봄에는 프리지어 향을 맡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여름에는 수국에 물을 주어 수국 꽃을 피웠으며, 가을에는 소국을 만지며 서늘해진 바람을 맞았다.

올해 우리집을 거쳐 간, 계절 꽃들


사실 식물 이름 몇 개쯤, 계절 담은 꽃 종류쯤 모른다고 해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아니, 전혀 지장이 없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3월이 오면 프리지어 한 단을 사 와 작은 꽃병에 꽂아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정서적 간격은 꽤 클 것이다. 지나가며 만난 꽃과 나무들의 이름을 궁금해하며 찾아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정신적 여유도 조금은 다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아이들이 조금 더 풍부한 정서를 품은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살아가는 동안 다른 건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마도 내가 물질적으로는 해줄 것이 별로 없는 엄마라서 그런 데 더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지금처럼 온몸을 던져 자연 속에 어울리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계절의 변화를 주변의 변화로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꽤 낭만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엄마의 소박하지만 원대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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