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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16. 2020

선량한 차별주의자, 그 불편한 진실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한 계기가 된 질문이었다. 혐오표현에 대한 토론회에서 일상에서 써오던 대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고, 토론회가 끝난 후 참석자 중 한 사람이 그렇게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 말속에 장애에 대한 ‘혐오’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저자는 그 질문 이후에 일상의 차별에 대한 관심을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정장애라는 말, 나도 별생각 없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었다.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망설이는 신랑에게, 뭐 그런 걸로 오래 고민을 하냐며 “결정장애야?”라고 묻고는 쿡쿡거리며 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옷을 사러 가서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몇 개를 두고 끝내 하나를 고르지 못해 사진을 찍어 “어떤 게 나한테 어울려? 나 결정장애잖아.”라는 메시지와 함께 가족에게 전송하던 나였다. 그렇게 일상적인 표현에 ‘장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담겨 있다니 정말 까마득히 몰랐다.      


나를 둘러싼 말과 생각들을 하나하나 훑는 작업은 마치 세상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중략)
희망적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10쪽~11쪽 프롤로그)     



책을 읽어가며 프롤로그의 이 문장들이 이해되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나는 ‘부끄러운 나를 발견’ 해야 했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조금의 다행스러운 점은 이 책을 통해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저자가 책 곳곳에 던져 놓은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1부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1부는 다시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다양한 기준으로 개인을 범주화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위치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다른 집단의 사람을 차별한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한 곳에만 서 있는 사람은 없으니 때로는 차별을 받는 쪽에 서기도 한다.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중략)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28쪽~29쪽,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내가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특권은 말 그대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매킨토시 교수가 작성한 백인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과 아이 둘이 있는 4인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특권을 누리고 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특권이라는 게,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큰 노력 없이 신뢰를 얻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느낌(32쪽)”을 갖는 것이라는 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내가 모든 일에서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성으로서, 한부모가정의 자녀로서,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엄마로서는 때론 꽤 많은 노력을 통해서야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때도 있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혼자서 밤길을 걸어야 할 때면 괜히 휴대전화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척을 해야 했고, 늦은 시간 택시를 타거나 대리를 부르기가 두려워 회식이나 모임에서 마음껏 취하지 못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나는 아빠가 안 계셔”라는, 일종의 커밍아웃과 같은 말을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 되어서였는데, 그 뒤로는 내가 무언가를 잘 해낼 때마다 “아빠 없이 잘 컸네”라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들어야 했다. 아이 엄마가 된 이후에는 유모차를 밀고 거리에 나설 때마다 높은 턱을 마주해야 했으며 대중교통을 탈 엄두는 함부로 낼 수 없었다. 큰마음먹고 한 외출에서 ‘노 키즈존’이라는 푯말에 발길을 돌린 경우도 허다했다.      


내가 특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만큼이나,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 었다. 나라는 한 사람만 보더라도 그랬다. 때론 철저한 약자 또는 소수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약자 또는 소수자와 연대하지 못했다. 스스로 약자로서 느끼는 소외감 앞에서 무력했던 경험을 하고도 다른 타자는 보지 못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다르다고 쉽게 범주화했다.

    

어렵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측면에서 약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중첩된 차별을 겪고 있고, 그래서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더 차별을 받기도 한다.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58쪽,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차별의 현실을 바로 보는 것, 그것부터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한 걸음 멀어지는 일이었다.      




2부는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라는 제목으로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쫓겨나는 사람들’ ‘“내 눈에는 안 보였으면 좋겠어”’ 총 4장으로 다시 나누어있었다. 차별의 위장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일상에서 차별이 ‘정당화’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흑인 분장, 몸매나 외모에 대한 비하 등 유머로 위장되는 차별, 능력주의에 입각한 차별은 공정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지워지는 차별, 공공적인 장소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차별 등, 그중 가장 와 닿았던 것은 ‘능력주의’에 입각한 차별이었다.      


능력주의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능력주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불평등이 정당하게 보인다. 본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집단에 대한 불이익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105쪽,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한동안 나도 그랬다. 나 역시도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자랐지만,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사람이었다. ‘개천에서 용 난’ 전형적인 사례였다. 임용이 되고 학교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일했다. 동료 중 상당수가 기간제 교사였고, 교무실에 근무하는 교무보조는 계약직이었다. 한창 ‘학교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던 때였다. 같은 일을 하는데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면서도, 정말 솔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지난날의 나의 노력이 떠올라 ‘과연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고등학교 동창의 소식은 내 의문에 불씨를 지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소위 말하는 ‘노는’ 친구였다. 공부를 잘했을 리도, 열심히 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뭔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밤잠을 자지 않고 수능 공부에 몰두할 때, 신나게 놀던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나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이 싹텄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불굴의 의지로 온갖 관문을 뚫고’ 정규직인 된 사람과, ‘훨씬 적은 노력으로 쉽게’ 비정규직이 된 사람을 어떻게 똑같이 대우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게 보인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실제로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같은 현재 상태가 아니다.(106쪽,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딱 내가 느낀 감정이 그랬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능력주의는 공정한 규칙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던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능력주의는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 책에서는 기업에서 내세우는 채용 기준에 대한 장애인의 입장과 학교의 우열반 편성을 예로 들어 능력주의가 결코 공정하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품고 있던 능력주의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저 차별주의자였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들은 친구의 소식에 마음껏 반가워하지 못했던 내 옹졸함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3부는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평등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 ‘모두를 위한 평등’,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구나 평등한 사회에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은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 모두를 위한 평등은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에서 나온다는 것, 여전히 통과되지 못한 채 논란 속에 있는 차별금지법을 다루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수호하는 질서가 단순히 기존의 관습이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헌법재판소의 말처럼 “헌법 이념과 헌법의 가치 질서”,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 등에 비추어 어떤 질서는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차별도 폐기되어야 할 질서 중 하나로, 이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로 이해되어야 한다.(162쪽,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     


일부 시민들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시위에 불편을 표했고, 동성애자들의 축제에 조용히 자기들끼리 즐기지 왜 광장으로 나오냐며 비난했다. 그들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나는 그런 모습을 한 발 비켜 선 채 지켜보며, 막연히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불편한 것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였다.      


어찌어찌 발의는 되었지만 통과까지는 갈 길이 먼 ‘차별금지법’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당연한데 뭘 법으로까지 제정하냐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하지만 법으로 제정하는 것과 개인의 윤리 도덕적 문제로 맡기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였다.      


헌법상 기본권이 실현되려면 법령이 필요하다. 가령 헌법 제31조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더라도 그 권리가 실제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제도, 기관, 사람, 절차, 예산 등이 필요하다. (중략)
헌법 제11조의 평등과 차별금지에 관한 권리도 마찬가지다. 제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만으로 저절로 모든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헌법과 국제 인권법의 원칙이 실현되도록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법률로써 구체화하는 작업이다.(193쪽,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이제까지 차별금지법에 대해 잘 몰랐다. 일상에서 불편을 느낄 만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느꼈기에 그랬을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장애인이었다면, 비정규직이었다면, 동성애자였다면 아마 달랐을 것이다. 그만큼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해서 무지했다.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 생각하니, 이토록 오랫동안 법으로 제정되지 못한 채, 논란 속에 둥둥 떠다니고만 있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동안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차별의 이야기는 단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로 표상되는 특정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돌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모두 조금씩 긴장을 늦추어, 다소 느슨하지만 낯선 것을 품을 수 있는 여유로운 관계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210쪽, 에필로그)          


책을 읽고, 수많은 관계 속에 살아가며 때론 내가 차별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삶은 저자의 제안처럼 ‘낯선 것’을 품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조금 더 예민한 눈과 귀를 갖고 싶다. 그로써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는 위장된 차별을 예리하게 발견해낼 수 있기를,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듣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내가 사는 세상이,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덜 차별적이고 조금 더 평등한 곳으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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