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나를 둘러싼 말과 생각들을 하나하나 훑는 작업은 마치 세상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중략)
희망적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10쪽~11쪽 프롤로그)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중략)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28쪽~29쪽,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어렵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측면에서 약자인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중첩된 차별을 겪고 있고, 그래서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더 차별을 받기도 한다.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58쪽,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게 아니다.)
능력주의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능력주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불평등이 정당하게 보인다. 본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집단에 대한 불이익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105쪽,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불굴의 의지로 온갖 관문을 뚫고’ 정규직인 된 사람과, ‘훨씬 적은 노력으로 쉽게’ 비정규직이 된 사람을 어떻게 똑같이 대우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게 보인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실제로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같은 현재 상태가 아니다.(106쪽,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
민주주의 사회에서 수호하는 질서가 단순히 기존의 관습이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헌법재판소의 말처럼 “헌법 이념과 헌법의 가치 질서”,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 등에 비추어 어떤 질서는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차별도 폐기되어야 할 질서 중 하나로, 이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로 이해되어야 한다.(162쪽,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
헌법상 기본권이 실현되려면 법령이 필요하다. 가령 헌법 제31조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더라도 그 권리가 실제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제도, 기관, 사람, 절차, 예산 등이 필요하다. (중략)
헌법 제11조의 평등과 차별금지에 관한 권리도 마찬가지다. 제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만으로 저절로 모든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헌법과 국제 인권법의 원칙이 실현되도록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법률로써 구체화하는 작업이다.(193쪽,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차별의 이야기는 단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로 표상되는 특정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돌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모두 조금씩 긴장을 늦추어, 다소 느슨하지만 낯선 것을 품을 수 있는 여유로운 관계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210쪽,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