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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22. 2020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생각한다는 것

서른 번째 시간-『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삶은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향해 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럼에도 죽음만큼 아스라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없다. 크게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고서야 죽음을 직시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죽음은 대체로 갑작스럽고 그래서 황망하며 때때로 두렵기도 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 일리치’ 역시 그랬다. 죽음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사고로 옆구리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통증은 이반 일리치를 죽음의 문턱까지 순식간에 데리고 갔다. 그 몇 주간 이반 일리치가 느낀 두려움과 좌절, 후회, 혼란, 번민이 너무도 생생하여 마치 내가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확인하는 동료 재판관들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동료 재판관들이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확인하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자신과 지인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관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죽은 건 자신이 아니라 이반 일리치였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으며, 이제부터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아주 성가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부인마저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그러기엔 이반 일리치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똑똑하고 활달하고 유쾌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으며, 능력 있고 쾌활하고 선량하며 사교적이면서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은 철저하게 해내는 사람(23쪽)’이었다. 심지어 동료들은 모두 이반 일리치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동료들을 비롯해 가족들에게까지도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은 어쩌면 극도로 개인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가 하루하루 시시각각 죽음의 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골몰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고통을 나눠 가지거나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시선을 보며, ‘과연 나의 죽음 앞에서 내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반 일리치의 동료나 가족들처럼 나의 죽음으로 얻어질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누군가는 내 죽음에 묘한 안도감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도감이란, 사실 나도 느껴본 적이 있는 감정이었다. 그리 가깝지는 않았어도 한두 다리 건너면 알만한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꽤 오래 슬퍼했던 적이 있다. 그 죽음을 떠올리면 그저 황망하고 진심으로 슬펐다. 하지만 가슴속 아주 깊숙한 곳에는 그 병이, 그 사고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 내 가족에게 닥친 비극은 아니었음에 감사하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의 가족, 나의 일상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긴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반 일리치의 동료들이 느낀 ‘안도감’과 전혀 다르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반 일리치는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사고(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힌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직시하게 된다. 오랜 시간 병을 앓으며 조금씩 죽음과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코앞까지 들이닥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처음에는 죽음을 부정하다가, 자신에게 닥친 죽음에 분노하다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는 심한 두려움과 좌절을 느낀다.      



“맹장이라! 신장이라! 이건 맹장이나 신장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은 여기에 있다가 이제 서서히 떠나가고 있어. 그리고 난 그걸 막을 수 없는 거야. 그래, 이렇게 나 자신을 속여봐야 뭐하겠어?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나만 빼고 다들 분명히 알고 있잖아. 문제는 몇 주 혹은 며칠이 남았느냐인데,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겠지. 이곳에 있던 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온통 어둠뿐이구나. 나 역시 이곳에 있지만 곧 사라지고 말겠지! 대체 어디로 말인가?” 온몸이 싸늘해지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두 귀에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없어지면 그 자리엔 뭐가 남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건가? 내가 없어진다면, 그렇다면 난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내가 죽는 걸까? 아니. 난 죽고 싶지 않아!’ (58쪽~59쪽)          


얼마 전까지 멀쩡하게 일을 하고, 가정을 지키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생각지도 못한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면 이반 일리치와 다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누가 되었든, 이반 일리치처럼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의심하고 부정하며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구도 그의 외로움을 돌보아주지 않았고 모든 두려움을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야 했으니, 그 외로움과 두려움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 지속되는 중에 이반 일리치 집사 일을 돕는 ‘게라심’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배설물을 치우면서도 언제나 명랑하고 밝은 표정이었고, 어떤 힘든 일을 부탁하더라도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기쁘게 해 주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거짓말이었는데, 오직 게라심만이 수척한 주인을 그저 가엾게 여겼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그날 밤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게라심의 광대뼈가 두드러진 선량한 얼굴을 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르면서 시작되었다. ‘내 삶 전체가, 의식적인 내 삶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예전 같으면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절대 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그게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맞서 싸우고 싶다는 충동, 마음속에 어렴풋이 떠오를라치면 서둘러 떨어내 버렸던 그 충동, 그것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망쳐놓았다는 사실을 의식하면도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는 똑바로 누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93쪽)          


이반 일리치는 평생을 ‘높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자신의 의무인양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것에 대해 의심해본 적도 없으며, 그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달랐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온 삶이 완전히 잘못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건강한 몸과 선량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물을 아무렇지 않게 치우는 하인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안쓰럽게 여기는 단 한 사람이 그 하인임을 느끼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게 된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나쁜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되돌아본 삶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어쩌면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자랑거리’로 살면서 직업도, 결혼도 오직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것’, ‘상류층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하는 것’에 맞추어 인생을 살아왔었다. 그의 삶에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무언가에 대단한 열정이나 진심을 쏟아부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반 일리치는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대로, 치열하게 자기 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죽음 앞의 번민이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거야. 하지만 상관없어. 올바른 것을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올바른 것’이 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나서 갑자기 입을 닫았다.
이 일은 사흘째 되는 날이 끝나갈 무렵, 그가 눈을 감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났다. 바로 그때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 방에 가만히 들어와 침대로 다가갔다. 죽어가는 이는 그때까지도 남은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러다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 부딪쳤다. 아들이 그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대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면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삶이 완전하지 못했다 해도 아직은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침묵하며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바라보았다.(97쪽)      


이반 일리치는 ‘올바른 것’에 대한 고민하던 와중에 자신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한 줄기 빛’을 보게 되고 이반 일리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에게 “용서해줘”라는 말을 하려다 실수로 “용감해줘”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내 이제까지 두려움과 어둠으로 점철되어 있던 죽음이라는 존재가 빛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는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며 숨을 거두었다.      


죽음의 순간에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가족들과의 시간보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일에 매달렸던 삶을, 아내와의 갈등을 회복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모른 척 무시하며 살아왔던 삶을, 그리고 끝내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는 솔직한 말 대신 분노와 화만 쏟아낸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을 사과하며 눈을 감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죽음의 문턱에 서면 그동안 잘못했던 것, 미안했던 일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도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잘못을 짧게나마 인정하고 사과한 뒤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어떤 누구에게는 그럴 시간이나 기회조차 없이 죽음이 덮치기도 하니까.           




죽음을 자주 생각하고, 곧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를 때에,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내 고민이 사라질 것이고, 무엇이 의무이며 개인적 욕망인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을 떠올릴 필요가 없으며, 다만 죽음이 점차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고요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문제’ 中)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내게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하고 싶지 않고 또 생각할 이유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지켜보며, 또 톨스토이가 남긴 말을 곱씹으며 앞으로는 죽음을 자주 생각해볼 작정이다.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 이 소설을 읽으며 내게 남은 질문은 역설적이게도 '삶'에 관한 것이었다. 당장 내일 죽음이 내 앞에 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매일을 고요하고 감사하게 살아야겠다. 무엇이 의무며 욕망인지, 무엇이 지금 내 삶에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지 죽음을 앞에 두고 고민해본다면 앞으로의 내 삶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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