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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16. 2020

젊음과 아름다움에 취한, 한 청년의 파멸을 바라보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유미주의에 심취했던 오스카 와일드에게 ‘도리언 그레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품에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바질 홀워드, 바질의 친구이자 도리언을 쾌락과 본능의 세계로 이끄는 헨리 워튼 경, 이렇게 세 사람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세 인물에 대해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라고 말할 만큼 이 작품에 자신의 세계관과 예술관을 쏟아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플롯은 단순하다.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도리언 그레이라는 한 인간이 아름다움과 쾌락을 좇다 자멸하는 이야기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도리언의 자멸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가 바로 그의 초상화이다.      




도리언 그레이에게 매료된 바질 홀워드는 자기 모든 예술혼을 담아 도리언의 초상화를 그린다. 초상화가 완성되는 날, 도리언과 헨리는 홀워드의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헨리의 유미주의적 태도는 도리언에게 큰 충격을 주고, 도리언은 이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과 정열을 느낀다. 완성된 초상화를 본 도리언은 너무도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초상화 속 자신에게 두려움과 질투를 느끼기에 이른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런데 이 그림은 항상 젊은 상태로 남을 것이 아닌가. 6월의 오늘보다 더 늙지 않을 게 분명한데 ……. 거꾸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 간다면! 그걸 위해서라면-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줄 텐데! 내 영혼이라도 내줄 용의가 있는데!(47쪽)          


그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도리언은 타락의 길에 접어든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무기로 쾌락과 본능에 의지한 삶을 산다. 마약에 손을 대고 여러 여자를 만나며, 어울리던 친구들을 타락의 길로 이끈다. 그리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간다. 아니, 죄책감은 초상화가 짊어졌으니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그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꼈다. 아니 이미 선택이 내려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인생이-인생이,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호기심이-이미 그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렸다. 영원한 젊음, 다함이 없는 열정, 은밀하게 찾아오는 쾌락, 미친 듯한 기쁨과 거침없는 죄악,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누려야 했다. 그리고 그의 불명예의 모든 짐은 초상화가 대신 짊어지고 가야 했다. 이것이 선택의 전부였다. (167쪽)     


아무리 많은 죄를 저지르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도리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전히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온갖 추문 사이에서도 그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점점 더 흉물스럽게 변해가는 초상화를 마주할 때마다 도리언은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 죄책감,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자신을 찾아와 바른 삶을 살 것을 조언하는 바질 홀워드를 원망하며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끝내 도리언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이 모두 초상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아! 자만과 격정에 휩싸인 그 끔찍했던 순간에 그는 초상화가 세월의 짐을 지고 자신은 영원한 젊음의 순수한 광채를 유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모든 그의 잘못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는 죄를 지을 때마다 확실하고 신속한 처벌이 뒤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야 했다. 처벌 속에 정화가 있는 법. 인간이 정의로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가 아니라 <사악함에 물든 우리를 쳐 죽여주옵소서>가 되어야 했다. (338쪽)     


도리언은 칼을 들어 너무나 혐오스럽게 변한 자신의 초상화를 스스로 베어버리지만, 실제 베어진 것은 초상화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 잘생긴 얼굴에, 미는 천재성의 한 형태지요. 실제로는 천재성보다 더 지고한 것입니다. 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미라는 것은 햇빛이나 봄날, 혹은 우리가 달이라 부르는 은빛 조개가 검은 물 위에 반사되어 비치는 것과 같이 세상의 위대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요. (중략) 나는 미가 세상 모든 경이 가운데 최고의 경이라고 생각하오.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은 천박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 이 세상의 진정한 신비는 가시적인 것이지,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란 말이오.(41쪽)      


헨리가 도리언을 처음 만난 날, 도리언에게 한 말이다. 너무나 완벽한 외모와 푸른 젊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도리언에게 헨리는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이야기한다. ‘미’는 천재성의 한 형태라고, ‘미’는 세상 최고의 경이라고.


과연 19세기, 유미주의자들만의 생각일까? 지금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미’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에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오직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그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조차 없이), 젊음을 유지하거나 이미 지나간 젊음을 되돌리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가끔 ‘미’라는 것이 두렵게 느껴진다.


음식을 거부하고, 뼈를 깎아내고, 전혀 다른 얼굴로 바꾸어주는 화장법을 찾고, 그렇게 찍은 사진 한 장을 SNS에 올리며 행복함이 가득 묻어나는 해시태그를 다는 사람들. 그들은 정말로 ‘행복’한 걸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젊음이 영원하리라고 기대하는 걸까. 그 아름다움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사상누각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나는 대단한 아름다움을 지녀본 적도 없고, 이미 10대와 20대의 청춘은 지나간 시간이라서 그들이 그저 안타깝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도리언 그레이만큼이나 엄청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거나, 쾌락과 본능을 만끽하며 사는 20대였다면 조금은 다르게 보였을지도.


나의 10대와 20대는 그 자체로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렇게 녹록지는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얼른 격정의 청춘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물론 스물아홉 살의 12월이 되어서는, 서른이 되는 순간에 내가 훅 늙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맞이한 서른은 불같은 이십 대보다 훨씬 더 안정감 있고 더 자주 행복했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젊음에 집착하는 도리언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초상화가 세월의 짐을 고스란히 진 덕에 흘러가는 시간을 모른 척했던 도리언은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울을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짓밟아 깨버렸다. 은빛 조각이 흩어졌다. 그를 파멸시킨 것이 바로 그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간절한 기도로 그토록 원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그를 멸망케 했다. 이 둘만 없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오점 없는 깨끗한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가면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의 젊음은 조롱거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청춘이라는 게 기껏해야 무엇이란 말인가? 설익은 풋내기 시절, 천박한 기분과 병든 생각으로 점철된 시절이 아니던가? 왜 그 청춘의 제복을 입었단 말인가? 젊음이 그를 망가뜨리지 않았는가?(339)          


도리언은 자신이 지닌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직 자신의 감정, 감동, 본능에만 충실한 삶을 살았던 도리언은 끝내 젊음과 아름다움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유미주의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도덕적인 결말이었지만 도리언의 삶을 떠올려 볼 때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나마 가장 납득 가능한 결말이기도 했다. 저자인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은 예술이므로 어떠한 메시지도 담지 않았다고 했으나, 독자인 내게는 도리언의 파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었다.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시간’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대단한 미모를 가진 사람도 ‘시간’을 소유할 수는 없다. 시간은 제 속도대로 흐르고 그 안에서 인간은 때론 무기력하다. 그렇다면 흘러가는 시간에 어떻게 나를 맡길지 생각해야 한다.      


도리언의 시간은 초상화에 나타난 대로 혐오스럽고 추악했다. 누군가는 도리언의 초상화처럼 그렇게 늙어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전혀 다르게 늙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외모의 소유자들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들은 삶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완성했다. 살아가며 쌓은 시간이 젊음과는 다른, 성숙한 아름다움을 이루어낸 것이다.    

  

요즘 들어 ‘예쁘다’는 말보다 ‘인상 좋다’는 말이 더 기쁘게 들리는 것은 그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눈가에는 하나둘 주름이 생기고, 화장하지 않은 볼에는 기미도 꽤 많이 올라왔지만 ‘웃는 모습이 참 선해 보여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잘 나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앞으로만 흐르는 이상, 나는 점점 더 늙어갈 것이고 그 속도에 맞추어 그나마 지금 가진 젊음 또한 빠르게 퇴색 해갈 것이다.

 

그럼에도 두렵지는 않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내게 주었던 것들, 그로써 내가 누렸던 많은 것은 이미 시간의 강을 타고 흘러갔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품고 싶다. 내 외모로 드러나는 세월의 흔적들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다.


주름이 자글자글 하더라도 잘 웃는 모습으로, 기미가 폭폭 박혔더라도 꾸밈없는 모습으로, 그렇게 따스한 인상으로 늙어가고 싶다. 그로써 도리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늙음이 그리 초라한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





*사족(蛇足)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마지막 장을 덮던 날, 잠이 오지 않아 유튜브로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예능을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이자, 어떻게든 챙겨보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방송 시간이 아이들을 재울 시간이라 본 방송을 보지는 못하지만, 유튜브로 모든 방송을 다 챙겨 볼 만큼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요즘 그 프로그램에서 연예인 게스트가 나오면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00인 조세호로 살기 VS 00인 공유로, 정우성으로, 주지훈으로 등등으로 살기


이 무슨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말인가. 조세호라는 사람도 게스트로 나오는 연예인들도, 내겐 그저 텔레비전 속 연예인일 뿐이지만 대체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걸까. 예의 있고 격이 있으면서도 유익하고, 재미까지 있는 유 퀴즈가 스스로의 품위를 낮추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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