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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07. 2020

엄마 휴가의 최종 결재권자는 엄마, 자신입니다.

엄마가 행복한 육아에는 휴가가 필요해요.

사랑이를 낳고 키우며 나는 모성애로 똘똘 뭉친 열혈엄마가 되었다. 나의 열혈 모성애는 출산 전부터 시작되어 그 지옥같던 입덧 시기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태교일기를 썼다. 출산 직후 조리원에  있는 동안에는 그 조리원에서 유일하게 새벽 수유도 강행하는 엄마였다. 조리원에서 나온 뒤 친정 엄마가 3주간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집에 오셨는데 그때 사랑이가 친정엄마 품에서 더 곤히 잘 자는 모습에도 질투가 날 정도로, 내 모성애는 정상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나의 모성애는 육아에 어설픈 신랑을 점점 더 어설프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사랑이에 관한 건 다 내 손을 거쳐야 했다. 몸살이 나서 몸져누웠을 때도 사랑이의 작은 칭얼거림조차 흘려듣지 못하고 기어이 기어나가 신랑에게서 사랑이를 받아 안아야 직성이 풀렸다. 내가 그러니 신랑은 육아에 아무리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도와주는' 입장 그 이상이 될 수 없었고 사랑이는 애착 물건 하나 없이 오로지 애착 엄마만 존재하는, 완벽한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모성애로 버티고 버텨도, 신랑이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줘도,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매일 반복되는 육아 일상,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의 24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것이었다. 하루만이라도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반나절만이라도, 아니 단 몇 시간만이라도 숨 쉴 틈이 필요했다.


사랑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 6개월쯤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만삭 때 보고는 못 본 친구들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정말 큰 용기를 내어서 신랑에게 소심하게 물었다.


"나 이번 주에 모임이 하나 잡혔는데 사랑이 재워놓고 늦게라도 나갔다 와도 돼?"


신랑의 대답은 오히려 쿨했다.


"갔다 와, 갔다 오면 되지."


그날따라 안 자려고 버티던 사랑이를 재우고 늦은 밤 겨우 모임에 나갔다. 오랜만에 정말 너무 신나게 놀았다. 신랑의 '허락'을 받고 나왔으니 떳떳했고 안심이 되었다.


뒤로 앞으로는 자주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다짐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누구도 붙잡지 않는데 내가 내 발목을 계속 잡았다.


'내가 나가면 신랑이 애 잠이나 재울 수 있을까, 두 남자가 먹는 건 제대로 먹으려나,  갑자기 애가 운다고 하면 어쩌지. '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또다시 아이에게 매인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봄이가 생겼고, 다시 입덧 지옥이 시작되었으며 정신 차리니 출산일이 임박했었다.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혼자만의 외출은 더더욱 엄두도 못 낼 일이 되고야 말았다.


구나 동생들이 육아에 지쳐 힘들다고 할 때면 엄마도 쉬어야 한다고 애들 떼놓고 나갔다 오라고 충고는 잘하면서 정작 나는 애들과 신랑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외출 한 번을  못했다. 




두 아이가 오른쪽 왼쪽에 매달려 하루 종일 징징거려서 진을 다 빼놓고는 겨우 낮잠에 든 어느 날, 애들이 물놀이를 하느라 어질러 놓은 욕실을 정리하러 들어갔다가 문득 거울을 보았다.  종일 얼마나 인상을 쓰고 있었으면 그때까지도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나는 애들 때문에 힘든 하루였다고 생각했지만 내 모습을 보니 나 때문에 아이들도 편하지 않은 하루였겠다 싶었다.


'하아, 내게도 쉼이 필요하구나. 옆에만 붙어 있는다고 좋은 엄마는 아니구나.'


그날 저녁 퇴근해서 돌아온 신랑에게 선언했다.


"여보, 이제 봄이도 좀 컸으니 나도 내 시간을 좀 보내야겠어. 오늘 애들한테 종일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생각해보니 애 둘 보느라 하루도 맘 편히 외출도 못했잖아."

"그래, 누가 뭐래?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서 내가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토요일 오전에 하는 독서모임이 있더라. 다음 달부터 거기 나가보려고."

"당신 좋아하는 거네. 가봐."

 "가기 전에 애들 아침 먹일 거 다 준비해놓고 갈게. 나 나가고 나면 애들 타요 만화도 좀 보여주고."


나가야지 마음을 먹고, 어디를 갈지까지 다 정해두고도 또 걱정이 앞섰다. 그런 나에게 신랑이 한소리 했다.


"아이고, 그냥 나가면 어찌 됐든 다 알아서 한다. 밥 한 끼 덜 먹어도 큰 일 안 나고. 걱정 말고 나갔다 와."


그렇게 첫 독서모임에 가기로 한 토요일 아침, 나는 애들 먹일 것과 애들 볼 때 주의사항을 잔뜩 적은 종이를 신랑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외출은 달콤했고, 독서모임은 즐거웠다. 끝나자마자 신랑에게 전화를 걸어 애들은 잘 있냐, 밥은 먹었냐 물어댔지만.. 그 반나절의 외출이 너무나 좋았다. 잠시라도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은 아비규환이었다. 식탁 위에 기저귀가 올라가 있는가 하면 이불이 거실에 널브러져 있고. 아침 먹은 것들은 엉망으로 싱크대에 쌓여 있었다. 욕실은 거의 뭐 전쟁터..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걸 보는데 화가 안 났다. 치우면 되지 싶었다. 원래 회사에서도 휴가 갔다가 돌아오면 밀린 일들이 많은 법이니!

일단 욕실을 정리한 뒤 머리를 질끈 묶고 오랜만에 정성 들여서 한 화장을 미련 없이 지운 뒤 아침에 벗어놓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모든 게 몇 시간 전과 같은 모습인데 왠지 아침과는 조금 다른 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징징거림에도 조금은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그 독서모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코로나로 벌써 두 달째 모임이 취소되었다. 슬프다.)


그렇다. 엄마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휴가의 결재권자는 엄마 자신이어야 한다.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는 내가 제일 잘 알기에 누구도 대신 나의 휴가를 결재해줄 수는 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내게 쉼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집을 나서야 한다. 그게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내 몸과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 가끔은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평화를 찾아야 아이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




하아..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은 휴가는커녕 24시간풀타임 근무다. 나라 전체가 비상이니 집안도 비상인 건 어쩔 수 없다. 이 사태가 끝나는 그날까지만 휴가 서류를 가슴 깊이 묻어두자. 끝나기만 해 봐라. 내 반드시 휴가 서류에 멋지게 결재사인을 하고는 가벼운 몸으로 집을 나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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