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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11. 2020

청포도와 귓속말

아이와의 대화 5

애들을 재워놓고 빨래를 개며 잠시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사랑의 콜센터라는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 한 소년이 "청포도 사랑"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파랑새 노래하는~"으로 시작하는 노래의 멜로디는 귀에 익숙했다.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데 갑자기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얼마  사랑이와이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랑이는 아기였을 때부터 밥보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기였다. 그중에서도 청포도는 사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 말을 시작하면서 엄마 다음으로 한 말이 아빠가 아니라 "포~"(포도)였으니 사랑이의 청포도 사랑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나눠먹는 기쁨에는 관심이 없는 아가였다. 그  대상이 엄마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랑아~엄마도 하나만 줄래?"


온갖 애교와 눈웃음을 총동원하여 다정히 물어봐도  대답은 언제나 도리도리였다. 엄마가 혹시나 제 것을 뺏어 먹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접시에 남은 청포도를 한입에 다 넣으려고 해서 황급히 "아냐, 아냐. 사랑이 다 먹어."라고 말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사랑이가 주는 청포도를 입에 넣고 말리라 다짐하며, 그게 마치 말 못 하는 아이의 사랑을 확인하는 척도인양 청포도를 간식으로 내어주는 날에는 어김없이 물었다.


"사랑아, 엄마도 청포도 하나 줄래?"


대답은 늘 도리도리였다.




그날도 저녁 식사 후 과일이 먹고 싶다고 하길래 냉장고를 열었더니 사두고는 잊고 있청포도가 눈에 띄었다. 


"사랑아, 오랜만에 청포도 줄까?"

"오예! 나 청포도 엄청 좋아해!"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아이에게 접시에 한가득 담은 포도를 내어 주었다. 주방 정리를 대충 해놓고는 기분 좋게 먹고 있는 사랑이 곁으로 갔다.


"사랑아, 엄마도 하나만 줄래?"


나는 아무 기대도 없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아~"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1초의 고민도 없이 "자~"하며 포도를 입에 쏙 넣어주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그 작은 행동이 내게는 너무나 대단한 일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래서 엄청 고맙다고, 사랑이가 먹여주니 더 맛있다며 할 수 있는 최고의 리액션을 했더니 사랑이는 씩 웃으며 놀이방에 가서 놀자고 했다.


뭉클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갑자기 사랑이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했다.

"엄마, 내가 나중에 어쩌고 저쩌고~."
"사랑아, 뭐라고? 소리가 너무 작아서 무슨 말인지 엄마가 못 들었어."
"엄마, 내가 나중에 어쩌고 저쩌고~"
"나중에 어쩐다고?"
"내가 나중에 많이 줄게요."
"응? 아, 포도?"
"응, 내가 나중에는 포도 많이 줄게요."

사랑이는 누가 들을세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말했다. 이미 예쁜 그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더 숨어 있을지 괜히 궁금해졌다.

"그런데 사랑아, 사랑이 소중한 포도를 엄마 왜 주는 거야?"
"음, 나는 엄마가 엄청 예뻐서 주는 거야."


심쿵!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엄마가 예뻐서 주는 거야? 엄마 진짜 너무 행복하다!"

사랑이를 와락 껴안았다. 있는 힘껏 안았다. 그리고는 엄마도 사랑이가 너무 예뻐서 청포도 다 주고 싶다며, 엄마가 오늘 사랑이 덕분에 너무 행복하다고 재차 말해주었다.




내 에너지를 가장 빠르게 소진시키는 것은 아이들이다. 외출을  못하니 쌓여가는 에너지를 풀지 못해, 별것 아닌 일로 울고 소리 지르고 짜증을 부리는 아이들을 종일 데리고 있다 보면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모두 다 빠져나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소진된 에너지를 가장 완벽하게 충전시키는 것 역시 아이들이다. 한 마디의 말, 꽃처럼 피어나는 미소, 온 집안에 울리는 까르르르 웃음소리로 종일 방전된 에너지가 단숨에 충전된다. 


그래서 육아는 힘들지만 행복하고, 버겁지만 뿌듯한, 하면 할수록 묘한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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