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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04. 2020

엄마는 천천히 먹는 음식이 그립다.

식사 전쟁의 종전을 선언할 날을 기다리며

"오늘 월급날인데 저녁때 뭐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

아침을 먹는데 신랑이 물었다.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여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천천히 먹는 음식이야."




아이가 하나였을 때만 해도 하루 한 끼는 밥다운 밥을 먹었다. 신랑과 함께 오붓하게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어른 둘에 애는 하나니 저녁 한 끼 정도는 제대로 된 밥을 먹었다. 신랑이 출근한 시간대인 점심 때는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아이 덕분에 거의 굶거나 빵, 고구마 등으로 끼니를 때웠고 그마저도 아이를 보며 서서 급하게 먹거나 지나다니며 하나씩 집어먹었다. 그래서 저녁 한 끼 정도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춰 제대로 된 밥을 먹으려 애썼다. 물론 그 속도가 '천천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둘이 되고부터는 매 식사시간이 정말 전쟁이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후로 네 식구의 삼시 세 끼(어린 둘째의 반찬은 하나라도 따로 만들어야 해서 삼시 세 끼가 아니라 삼시 육 끼인 느낌이다)챙기면서 식사 준비부터 전쟁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건 서막에 불과할 뿐.... 진짜 식사 시간이 되면 밥 먹기 싫다는 사랑이를 식탁에 앉히는 일부터, 밥은 빼고 저 좋아하는 반찬만 골라먹으려 하는 봄이를 달래 겨우 밥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일까지 하나도 순탄한 일이 없다. 사랑이는 밥을 스스로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밥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과 엄마가 동생을 먹여주는 것에 대한 질투가 뒤섞여 오로지 엄마가 먹여주는 것만 먹겠다고 앉아 있다. 봄이는 밥알이 한 톨이라도 섞여 들어가면 귀신같이 알고 퉤퉤 뱉어대는 통에 온 바닥이며 식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니 식사 시간이 전쟁이 아닐 수 없다. 맞은편에 앉아서 밥을 먹는 신랑은 봄이도 사랑이도 나한테만 붙어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기 밥만 먹고 있다. 그걸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었다가 또 이해도 됐다가 온갖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어서 매 식사시간마다 몸도 마음도 힘이 든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반공기가 조금 넘는 밥을 한 번도 끝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 오른쪽에 봄이, 왼쪽에 사랑이 두 아이를 번갈아 챙기며 내 밥도 먹어보려 하지만, 애들을 먹이다 보면 진이 빠져서인지 내 밥그릇의 밥은 꼭 서너 숟가락이 남는다. 두 아이를 어떻게든 먹여 식탁 아래로 내려보내고 나면 있던 식욕도 다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먹기 싫고 오로지 커피 생각만 난다.  안 먹이면 굶기면 된다는데 몇 끼를 굶고도 식사에 애착이 없는 아이들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엄마는 없을 거다. 식사 전쟁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철저히 패배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은 더 힘든 시간이었다. 사랑이가 계속 놀고 싶다며 저녁 안 먹을 거라고 노래를 부르는 통에 그걸 달래서 식탁에 앉히는 것부터 이미 진이 빠졌다. 봄이는 역시나 반찬만 먹겠다며 밥은 싫다고 도리도리... 그런 두 아이를 어떻게든 먹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봄이를 어느 정도 먹이고 사랑이의 식사를 도와주고 있는데 봄이가 제 자리에서 내 자리로 넘어온다고 발을 디뎠다. 맞은편에서 그걸 본 신랑 눈에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나 보다. 나는 그때 사랑이 밥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맞은편에 있던 신랑이 "봄이 떨어지겠다!" 하는데 내가 어떤 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진짜로 봄이가 식탁 의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지난주에도 식탁 의자에서 서있다가 뒤로 쿵 떨어져 머리에 아기 주먹만 한 혹이 나서 엑스레이까지 찍었었는데 또 똑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봄이가 떨어짐과 동시에 신랑은 "내가 위험하다고 했잖아!"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 순간 너무 분하고 억울한 마음과 봄이에 대한 미안함, 걱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나는 두 아이 모두 이리 먹이고 저리 먹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자기는 자기 밥 다 먹고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게 너무 화가 났다. 더불어 또 내 곁에서 나의 부주의로 아이가 떨어졌다는 죄책감에 너무 괴로웠다. 세게 떨어진 건 아니라서 봄이는 금세 진정이 되었지만 내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봄이는 더 이상 밥을 먹지 않았고, 나도 절반이 넘는 밥을 남겼다.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봄이는 이내 잘 놀아서 걱정이 덜했지만, 두 아이의 식사를 매번 이렇게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힘들고 버거웠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가장 뒷전인 내 식사가 스스로 짠하고 가여웠다.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식탁을 수족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기운이 쭉 빠지는 날에는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도 그렇게 자기 식사를 뒷전으로 두고 우리의 식사를 알뜰살뜰히 챙기며 살았겠지. 하긴 지금도 친정에 가면 엄마는 자기 식사가 가장 뒷전이다. 울 엄마도 그렇게 나를 키웠지. 그러니 나도 조금만 더 참아보자. 견뎌보자.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고 나면 더 이상 내 식사가 뒷전이 아닌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오늘을 추억하며 그런 날도 있었다고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아,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다독여보고 스스로 위로해봐도 오늘은 천천히 먹는 음식이,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식기 전에 먹는 음식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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