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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29. 2020

감정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감정의 물성」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꽤 자주 내뱉던 말이었다. 도대체 마음이라는 녀석은 몸의 어디에 숨어 있길래, 이토록 내 전부를 지배하는지 알고 싶어 심리학 책을 뒤적이던 때도 있었다. 아마 내가 이성보다는 감성에 예민한 사람이고, 감정에 자주 지배받는 사람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해야 할 일을 그르치고, 지켜야 할 사람들을 잃은 몇 번의 경험이 그런 결심을 하게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가 잘 인지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행복하구나.’

‘지금 나는 우울하구나.’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

‘지금 나는 기쁘구나.’     


내가 나의 마음을, 감정을 객관화해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감정의 물성」은 그런 맥락에서 꽤 흥미로운 단편소설이었다.


     



감정을 물성화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만져지지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감정을 보이고 만져지며 냄새를 가진 물체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 말로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래요. 종류도 꽤 많아요.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공포체’, ‘우울체’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고, 파생되는 제품으로 비누나 향초, 손목에 붙이는 패치도 있고요. 지금 유진 씨가 구해온 건 침착의 비누라는 건데, 진짜 비누처럼 써도 되지만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나 봐요. 10분 정도 사용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193쪽~194쪽)     


공포, 우울, 침착, 분노, 증오, 설렘, 행복, 기쁨 등 아주 구체적인 감정을 물성화한다는 상상력이 새로웠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 물성화된 감정을 만지거나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잡지 에디터인 주인공 정하는 세상을 들썩이게 한 ‘감정의 물성’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한 플라세보 효과에 사람들이 동요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감정의 물성’에 더욱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연인인 보현마저 감정의 물성 제품을 구입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로써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되는데, 그 의문이 내가 궁금했던 지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우울’이나 ‘분노’, ‘공포’ 따위를 사려고 하는 거지?”(200쪽)     


긍정적인 감정을 돈을 주고 사는 행위까지는 비교적 이해가 쉽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오고자 노력한다. 우울을 극복하려 하고, 슬픔을 이겨내려 한다. 괴로운 일보다 즐거운 일을 찾고, 궁극적으로 행복한 감정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울과 분노, 공포를 돈을 주고 사다니?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205쪽)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214쪽)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216쪽)     


정하의 질문을 받은 잡지사 후배인 유진의 대답(205쪽)이나, ‘감정의 물성’을 개발한 개발자의 이야기(214쪽)이나, 정하의 연인인 보현의 말(216쪽)을 통해 부정적 감정을 구입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도 때론 울고 싶어서 일부러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를 찾아보기도 했고, 억눌러진 감정을 분출하고 싶어서 화를 돋우는 기사를 읽으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을 내뱉어 보기도 했다.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감정을 모른 척하려고 했을 때였다. 긍정적인 감정은 모른 척이라는 게 되지 않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대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슬프지만 애써 괜찮은 척, 우울하지만 애써 우울하지 않은 척, 괴롭지만 애써 이겨낸 척, 그렇게 ‘애써’와 ‘척’이 만나면 언제나 그 끝이 좋지 않았다. 그 감정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짐작도 할 수 없는 순간에 와르르 쏟아져 나와 애먼 사람에게 불똥을 튀기거나 엉뚱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우울이나 분노, 증오와 괴로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든, 기쁨과 설렘, 행복과 사랑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든,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나 스스로 분명히 인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분히 공감되었다. 감정을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냄새로 맡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 스스로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정말 소설 속 한 장면처럼 감정을 물성으로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행복하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대신에 ‘행복’ 비누로 손을 씻고, 누군가에 대한 설렘을 느끼기 위해 ‘설렘’ 초콜릿을 먹으며, 슬픔에 빠져 실컷 울고 싶어 ‘슬픔’ 향수를 뿌리고, 우울을 직시하기 위해 ‘우울’의 자갈을 만지작거리는 세상이라…….  

 

만약 '감정의 물성'이라는 제품이 정말로 출시된다면, 미래의 나는 그것을 구입해볼 의사가 있을까? 어떤 감정을 구입하려 할까? 그것이 내가 내 감정을 통제하는 데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여러 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밤이다.



[줄거리]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에서 ‘감정의 물성’이라는 신제품을 출시한다. 이것은 인간의 여러 감정들을 실제 존재하는 물성으로 구현한 것으로 저마다의 색, 모양, 향기, 질감을 가져 감정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제품이었다.

잡지사 에디터인 정하는 그 제품을 일종의 플라세보 라 여기며 평가 절하하지만, 이미 인터넷 SNS, 공중파 방송 등에 소개될 만큼 큰 유행이 된 것이었다. 정하와 오랜 기간 연인이었던 보현도 집에서 결혼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정하와 의견까지 맞지 않아 우울함에 빠진 채, ‘우울체’를 구입한 터였다. 정하는 보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 감정의 물성은 마약류로 분류되어 판매 중지 처분이 내려진다. 정하는 그 뒤 ‘감정의 물성’ 개발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고, 뒤이어 보현과도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인간은 자신 내부의 보이지 않는 감정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지고 느끼는 과정을 의미 있게 여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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