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가족, 제사에 대하여
“기일 저녁 여덟 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리고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중략)
“엄마가 젊었던 시절 이 섬을 걸었으니까, 우리도 걸어 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합시다.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상품이 있어요?”
“아니, 그래도 제사니까 상품은 좀 그렇고 박수를 쳐 줄 거야.”(83쪽~84쪽)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들은, 오전부터 바삐 집을 나서거나 구석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며 도사렸다. 별것 아닌 일에 진심을 다해 도사리는 것이 이 집안사람들의 공통점이구나 서로 헛웃음을 웃으면서도 끝까지 그랬다. (308쪽)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331쪽)
심시선 :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진행자 : 아, 따님에게요? 아드님 있으시잖아요.
심시선 : 셋째요……? 걔? 걔한테 무슨. 나 죽고 나서 모든 대소사는 큰딸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10쪽, TV토론 <21세기를 예상하다>)
심시선 :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 : 렌즈요?
심시선 :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 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20쪽 『여성XX』주최 다과회 녹취록)
다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아무것에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날들이.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내 안의 나선 경사로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야겠다고.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 그것이 좋은 예술가가 되는 길인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30쪽, 예술대학 강연에서 심시선의 말)
자기 자식이 어떤 성품인지 다 아실 테니 재능의 있고 없고를 떠나,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해칠 것 같습니까? 즐겁게 그리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지,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하는지 관찰하십시오. 특히 후자라면 더더욱 인생의 경로를 대신 그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아이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다른 사람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네, 다른 사람입니다. 부모도 결국 다른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걷어내주시기야 해야겠지만, 가능성이 조금 번쩍대다 마는지 오래 타는지 저가 알아서 확인하도록 두십시오.(220, 부모 연합 초청 강연에서 심시선의 말)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소소한 행복에서 의미를 찾자, 바깥의 평가보다 내면이 충실한 삶을 택하자는 요즘의 경향에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동의하는지 궁금했다.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성취를 하려니 생활이 망가지고, 일만 하다가 죽을 것 같고…….(248쪽, 우윤의 생각)
육아휴직이 제대로 지켜지는 여초 회사에서도 여자들은 회사를 그만두곤 했다. 주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가 고비였다. 경아도 회사에서 학교로 몇 번이나 달려갔는지 모르고, 잠자리 쫓으러 다니는 남편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끔 명은이 부러웠다. 남매를 낳은 걸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벼운 삶이, 무엇에든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경아는 집중력도 기억력도 다른 온갖 수행 능력도 사실 산산조각 난 채 십수 년을 살아왔다. (263쪽, 경아의 생각)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지요.”(269쪽, 화가 황민하가 기억하는 심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