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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an 07. 2021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정의에 대한 여러 접근법, 정의에 대한 고찰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의’에 목말라 있고, 덕분에 이 책은 관련 분야에서 아직도 베스트셀러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상당히 많았지만,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아 내내 숙제처럼 미루어두었다. 그러다 작년에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출간되면서 아무래도 이 책을 먼저 읽어야 다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게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정의’의 개념을 단순하게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자주 사용하는 ‘정의’라는 단어에 깃든 철학적 바탕을 찾아가는 책이다. 저자는 어떤 철학적 관점으로 ‘정의’를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전혀 달라질 수 있으며,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정의’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만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로써 저자는 독자에게 ‘정의’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갖도록 한다.


또한 이후에 전개될 정의에 대한 철학적 견해들을 크게 세 가지 접근법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첫 번째는 정의란 복지의 극대화라고 생각하는 이론으로 공리주의적 접근이다. 두 번째는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일련의 이론들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접근과 자유시장에서 평등을 옹호하는 공정성 진영의 접근이다. 세 번째는 정의가 미덕 혹은 좋은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접근이다.      


2장부터는 10장까지는 1장에서 개괄적으로 제시한 정의에 대한 여러 관점을 상세하게 풀어 설명한다.


2장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는 ‘정의’를 다룬다. 공리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복지’로, 이러한 관점에서 정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불가피한 희생도 눈감을 수 있다. 공리주의가 가장 크게 비판받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공리주의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 개개인의 권리는 존중하지 않는다. 또한 비용과 편익의 분석에 따라 모든 정책을 마련하다 보니, 사람의 목숨까지도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3장은 자유주의적 관점 중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는 ‘정의’를 다룬다. 자유지상주의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 이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이는 경제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때문이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4장은 징용제와 모병제, 대리 출산 등의 사례를 바탕으로 과연 자유 시장은 공정한지, 돈으로 살 수 없거나 사면 안 되는 재화가 있을지 묻는다. 자유 시장 회의론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 겉보기처럼 항상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돈으로 거래할 경우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지는 재화와 사회적 행위가 존재한다고 한다.      


5장과 6장은 자유주의에 기본을 두었지만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달리 행동의 동기를 중시하는 칸트의 관점과 평등을 중시하는 존 롤스의 관점을 다룬다. 


칸트는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도덕이란 행복 극대화나 그 밖의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며,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율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도 말한다.


칸트는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한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며 ‘의무 동기’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여기서 의무 동기란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를 말한다. 즉 어떤 행동을 수단이나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의무감에서’ 했을 때에만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존 롤스는 평등을 보다 강조하였다. 롤스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할 것인지를 붇는 방법으로 정의를 생각해보자고 주장한다.”(214쪽) 제도적으로 기회균등 및 자유 시장을 보장하는 체제는 자유지상주의 정의론에 부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기회가 매우 균등하지 않게 배분될 수도 있다는 것이 롤스의 생각이다. 이런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기회균등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조치들로 이를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롤스는 능력주의 사회 역시 정의롭다고 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롤스는 ‘차등 원칙’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재능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연마하도록 독려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둔 대가는 공동체의 몫임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차등 원칙은 소득과 부를 똑같이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 밑바탕에는 평등에 대한 단호한 시각이 존재한다. 롤스는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각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 사회적 여건을 우리를 위해 이용하자”라고 제안한다.     


7장은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논쟁으로 보는, 권리와 자격 사이의 논쟁을 다룬다. “정의와 도덕적 자격을 분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에 대한 찬반 논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정의와 도덕적 자격을 분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며, 그 이유로 정의에 대한 논쟁은 영예,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와 결부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8장은 정의와 도덕적 자격을 결부시킨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중립적일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영예, 미덕, 좋은 삶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걸 의미한다. 즉 정의는 능력에 따라, 연관된 탁월성에 따라 차별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9장은 정의를 미덕과 연결시키는 관점의 연장선으로 “공동체주의적 비판가”들의 접근법을 다룬다. 저자는 앞서 살펴본 여러 정의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선택의 자유가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 충분하지 않으며,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으려는 시도도 방향성을 잃기 쉽다고 판단했다. 결국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다루지 않고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지 않으며,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음을 주장한다.


이 장에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삶은 서사적인 탐색과도 같다고 한다.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는 시각에서는 도덕적 책임의 범주에 자연적 의무(인간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대우하며 잔인한 행동을 삼가는 의무), 자발적 의무(사회적 합의에 의해 생겨난 의무) 외에 연대 의무 또는 구성원의 의무라는 새로운 의무를 인정한다. 연대 의무에는 우리가 져야 할 도덕적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칸트와 롤스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된 존재이기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도덕에 구속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정의와 권리에 관한 여러 쟁점 중 상당수가 도덕적이며 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주제를 피할 수 없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할 때 좋은 삶에 관한 여러 견해를 빼놓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오히려 반발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지 않으면 시민의 삶은 저하되고 사회는 편협하며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쉬워진다. 결국 정의에 대한 토론은 본질적인 도덕 문제로 빠지기 마련이다.      


마지막 10장은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 우리는 중립을 향한 열망이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중략)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경쟁하는 여러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결국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좋은 삶을 다 같이 고민해야 한다면, 어떤 정치 담론이 우리는 그 방향으로 이끄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의 모습으로 몇 가지 가능한 주제를 소개한다. 첫째, 희생, 봉사를 통해 시민의 미덕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 둘째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하고 선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공개 토론 제안, 셋째, 불평등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분배 정의와 공동선 사이의 연관성을 조명할 것, 넷째 도덕적인 참여 정치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유망한 기반을 제공할 것이 그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서양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하다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장점은 분명하다. 먼저 서술상의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정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이 어떤 과정에서 등장하였는지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서술되었다.

복지를 추구한 공리주의의 ‘정의’,

그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등장한 자유지상주의의 ‘정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과는 다른 자유를 역설한 칸트와 롤스의 ‘정의’

정의는 개인의 자유 혹은 권리보다 좋은 삶과 연관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공동체주의적 비판가들의 ‘정의’까지, 정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각 관점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도 큰 장점이다. 칸트나 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쉽지 않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짧은 지면에 다루었지만, 비교적 이해가 쉬웠던 것은 그런 사례들 덕분이었다.      



이 책이 미국에서보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 때, 저자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목말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여전히 대한민국은 정의롭지 못한 면이 많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킬 만한 사건은 과거보다 더 자주 일어나는 듯하고, 공분이 가라앉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타인의 문제로 남겨지는 경우도 많다. 결국 사회는 바뀌지 않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우리는 정의에 목말라하면서도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나 생각했다. 아마도 어떤 문제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보다 감정적인 동요에 더욱 집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감정은 언제나 가라앉게 마련이고, 한 번 가라앉은 감정은 쉽게 다시 들끓지 않는다. 감정으로 분노한 만큼, 관련 논의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태도로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나의 의견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공론화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 필요하고, 논리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가감 없이 교환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도덕적 사고가 우리의 판단과 원칙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사고로 정의나 도덕적 진실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가령 도덕적 직관과 원칙에 입각해 평생을 헌신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되풀이되는 편견의 타래에 머물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실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도덕적 사고란 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답하고자 한다. 따라서 친구, 이웃, 전우, 시민 등의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 대화 상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과 논쟁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자기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을 방식을 찾을 수 없다.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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