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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an 25. 2021

『달과 6펜스』(서머싯 몸)

달을 좇아 6펜스를 모두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달과 6펜스』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꿈을 좇아 현실을 모두 버린  한 남자(스트릭랜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중략)
아니 나이가 사십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요.
(중략)
당신 나이에 시작해서 잘될 것 같습니까? 그림은 다들 십칠팔 세에 시작하지 않습니까?
열여덟 살 때보다는 더 빨리 배울 수 있소.
어째서 그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대답이 없었다. 눈길이 지그시 오가는 인파를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가 인파를 보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그려야 해요. (67쪽~68쪽)          



스트릭랜드는 ‘그려야 한다’고 했다. 오직 답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안온했던 가정을 한순간에 박살 내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 마흔의 남자는 변명하지 않았다. 단호한 어투로 오직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자신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이상과 현실, 조화로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단어들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그 꿈으로 현실을 지탱하고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은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애당초 꿈을 꾸는 일조차 포기하기도 하고, 선명한 꿈이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저 마음에 품고만 살기도 한다. 간혹 꿈을 위해 가혹한 현실을 감당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극히 일부이다.

      

먹고 살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꿈을 좇는 이들은 쉽게 환영받지 못한다. 먼 거리에서 그런 이를 본다면 한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가끔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일, 나의 가족의 일이 됐을 경우에는 다른 마음이 든다. 나의 일일 경우에는 삶이 팍팍하게 느껴져 꿈을 좇는 것이 버겁기도 하고, 가족의 일일 경우에는 답답함과 안쓰러움, 때론 원망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달과 6펜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를 가리킨다. 또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암시하기도 한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난다. 하지만 둘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달빛은 영혼을 설레게 하며 삶의 비밀에 이르는 신비로운 통로로 사람을 유혹한다. 마음속 깊은 곳의 어두운 욕망을 건드려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지게도 한다. 그래서 달은 흔히 상상의 세계나 광적인 열정을 상징해 왔다. 6펜스란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의 값이다. 이 은화의 빛은 둔중하며 감촉은 차갑고 단단하다. 그 가치는 하찮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작품 해설 中)     


스트릭랜드는 '달'을 찾기 위해 자기가 가졌던 모든 '6펜스'를 버렸다. 비참하게 살았지만 스스로 비참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다고 했고, 그의 모습은 모든 것을 가졌을 때보다 도리어 편안하게 보였다. 어느 정도의 열망을 가진 꿈이면 그럴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강렬한 꿈이길래, 현실적인 문제가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편안해’ 보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미장이니 목수니 하는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다. 일은 더 열심히 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생활을 품위 있고 아름답게 해 준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돈에도 무관심했다. 명성도 안중에 없었다. 우리들 같으면 대체로 세상일에 적당히 타협하고 말지만 그는 그러한 유혹에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칭찬할 수는 없다. 그는 그런 유혹조차 느끼지 못했다. 타협이란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파리에 살면서도 그는 테베 사막에 사는 은자보다 더 고독했다. 그가 친구들에게 바란 것은 오직 자기를 혼자 있게 내버려도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것에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희생시켰다) 자기희생쯤이야 많은 사람들이 하지만). 그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221쪽)    



자기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희생시키며 비전을 찾아간 사람, ‘나’의 서술에서처럼 그를 칭찬할 수만은 없다. 비전을 위해 세상과 일체의 타협도 하지 않은 채 은자의 삶을 살아간 사람, 내게는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을 연이어 읽고서야 조금은 이해가 되었고,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사실 그가 소설 속 인물이었기에 그제라도 받아들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였다면, 어쩌면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만약 나에게 스트릭랜드와 같은 이상이, 꿈이 있다면 어떨 것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을 모두 저버릴 만큼의 강한 열망을 일으키는 일이 불시에 찾아온다면? 도저히 그 일을 하지 않고는, 그 꿈을 좇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듯한 갈망을 느낀다면? 오직 그것만이 보이고, 그 길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스트릭랜드처럼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내게는 현실이 너무나 절박했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 발 딛고 선 현실을 이루기까지 숱한 고비를 넘어왔다. 내가 딛고 있는 이 현실의 순간이, 꿈이자 이상이었던 지난날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상을 추구하는 스트릭랜드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삶은 그의 삶대로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삶에 만족했고, 자신의 선택에 행복을 느꼈다. 그런 선택을 했기에 그는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 역작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온하고 평안한 삶을 살면서 꿈을 추구했다면 그만큼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의 삶은 그 정도의 비범함은 있어야 되는가 보다. 나 같은 '범인(凡人)'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해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달과 6펜스』는 좋았다. 끊임없이 나의 ‘달’과 ‘6펜스’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달’은 무엇인가, 나에게 ‘6펜스’는 무엇인가. 읽는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아쉬움 없이 선택할 만한 ‘달’이 내게는 있는가.

해설에 나온 것처럼 6펜스는 정말로 ‘하찮은 것’인가.

6펜스가 전혀 없는 삶에서 과연 ‘달’을 그리는 것이 가능한가.

‘달’이 선명한 사람은, 달을 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큼 강렬한 열망의 ‘달’을 그려야 하는가.      

만약 양자택일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달과 6펜스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수많은 고민을 받아 들었다. 고민하게 하는 책은 좋은 책이다. 그러므로 『달과 6펜스』는 근래에 읽은 책들 중 손꼽힐 정도로 좋은 책이라 할만하다.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꿈을 찾는 사람들, 이상을 그리는 사람들, 현실에 허덕이느라 꿈을 잃은 사람들, 꿈을 찾아가는 길에 서있으면서도 현실적 어려움으로 주저하게 되는 사람들,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저마다의 울림을 줄 만한 책이 될 것 같다.




덧붙임. 『달과 6펜스』는 저자인 서머싯 몸이 폴 고갱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달과 6펜스』속 스트릭랜드의 그림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폴 고갱의 그림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줄거리>

  『달과 6펜스』는 1인칭 관찰자 시점(‘나’라는 인물이 주인공을 관찰하는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다. 소설 속 ‘나’는 작가이고,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화가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증권 중개인였다. 나이는 마흔쯤 되었고,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둔 안정적인 가정의 가장이다.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아주 평범한 생을 살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가족 휴가에서 먼저 돌아온 찰스 스트릭랜드는 부인과 아이들에게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집을 나간다. 부인은 스트릭랜드가 여자가 생겨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고 평소 친분이 있던 ‘나’에게 스트릭랜드를 찾아가서 돌아오라는 말을 전해주기를 부탁한다. ‘나’는 부인의 부탁을 받고 런던에서 파리로 스트릭랜드를 찾아 가지만, 파리에서의 스트릭랜드는 예상 밖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가족을 떠나왔다고 말하고, 결코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받을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은 오직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만 반복한다.

  얼마 뒤 희곡 작업을 위해 파리로 가게 된 ‘나’는 스트릭랜드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스트릭랜드의 몰골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가난에 찌들어 있는 모습에서 과거 안정적으로 살던 시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개성이 있었지만 당대 화단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단 한 사람, ‘나’의 친구이자 화가인 더크 스트로브만이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인정한다. 더크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무례한 행동도 모두 참아내가며 그의 삶을 도와주고자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더크를 도리어 무시하고 하찮게 대한다.

  더크 스트로브에게는 블란치 스트로브라는 아내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따뜻한 가정을 꾸린 채 편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릭랜드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본 더크는 블란치에게 스트릭랜드를 집에 데려오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블란치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큰소리까지 내며 격렬한 반대를 표한다. 스트릭랜드의 무례함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가 집에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끝내 더크의 말에 따라 스트릭랜드를 집으로 데려오고 블란치의 예감대로 두 사람 사이에 비극이 일어난다.

  블란치가 스트릭랜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더크는 블란치와 스트릭랜드에게 자신의 스튜디오까지 내어준다. 그들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블란치가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블란치와 스트릭랜드는 결코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다툼 끝에 블란치가 음독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이 일로 더크는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이후에 스트릭랜드는 여러 일을 거치다 타히티라는 섬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인생의 말년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호텔 주인 타이레의 소개로 아타라는 어린 원주민 여자와 결혼을 하여 섬 깊숙한 곳에서 외따로 살게 된다. 아타는 스트릭랜드 곁에 머물렀던 전 부인이나 블란치와 달리, 오직 스트릭랜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골몰하는 여자였다.

  스트릭랜드는 그곳에서 모든 예술혼을 불태우고 끝내는 나병에 걸려 사망한다. 나병이 발병하고 죽기 전까지 스트릭랜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집 안의 벽면 전체에 마지막 역작을 완성해낸다. 그리고 유언으로 그 집을 모두 불태워달라고 하고, 아타는 유언에 따라 역작이 담긴 집을 불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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