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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Feb 25. 2021

『인생 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을 읽으며 마음의 처방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2년째 책에 매달리며 꽤 많은 책을 만나오고 있지만, 이 책은 좀 달랐다. 그동안 살아내기 바빠 마음이 시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내게, 이 책은 촉촉한 여름비가 되어 내렸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시들어가던 마음의 마디마다 선한 빗줄기가 쏟아졌고, 책을 덮는 순간 마음에 생기가 돋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책을 두고 ‘인생 책’이라고 하는 가보다.      




『인생 수업』은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하여 기록한 강의록이다. (실제 강의를 한 것은 아니고, 강의 형식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두 저자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인생의 교사라고 표현했다. 이들에 따르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렇다면 무엇이든 너무 늦을 때까지 막연히 기다려서는 안 되며,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인생의 교훈이었다.


책은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 이전에 이 책의 번역을 맡은 류시화 시인의 글이 나오고, 본문 뒤에는 두 저자의 짧은 글이 한 편씩 이어진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2. 사랑 없이는 여행하지 말라
3.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5.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6. 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7. 영원과 하루
8.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9. 용서와 치유의 시간
10.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각 장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통해 바라본 자존,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죄의식, 감사, 받아들임, 용서, 치유, 행복 등에 대한 가르침들이 너무도 따뜻한 말들로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은 각 장마다 감상을 따로 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생각거리를 다루고 있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온 부분은 8장이었다.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라는 제목으로 서술되는 8장에서 다루고 있는 가르침은 ‘인내심’과 ‘받아들임’이다. 저자는 ‘인내는 가장 힘든 배움, 아마도 가장 큰 절망감을 안겨 주는 배움(201쪽)’이라고 말했다. 즉석식품 시장이 유래 없이 커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집 앞으로 총알배송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인내’는 너무도 낯설고 어색한 단어가 되었다. 휴대전화에서 인터넷이 조금만 버벅거려도 견디지 못하고, 주문한 음식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실제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울화가 치미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다림’은 구시대적인 단어처럼 들린다. 이처럼 일상의 순간에서 인내와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다 보니, 삶의 고비를 맞닥뜨렸을 때 인내할 힘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법을 잊어버렸고, 심지어 기다림의 의미조차 알지 못합니다.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좋지만, 만족을 뒤로 미루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중략)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다림이 주는 불편함이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이치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202쪽~203쪽)     


나는 이제껏 주어진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더 가치 있는 일로 여기며 살았다. 주어진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더 나은 방향으로, 더 득이 되는 방향으로 바꾸어가는 일이 삶의 목표인 것처럼 살아왔다.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마음과 시간을 들였다. 하지만 때마다 내가 생각한 대로 혹은 계획한 대로 상황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실망했고, 좌절했다. 그럼에도 기다리고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다시 일어섰고, 노력했다.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인생이 참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토록 열망했던 나의 일이, 너무도 사랑해서 함께 하기로 결심한 남편이, 내가 품어 세상에 내어놓은 나의 두 아이가, 나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해온 일들이, 모두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나를 버겁게 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때마다 어떻게든 바꾸어보려 노력했던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대상’이고 ‘상대방’이었으며 ‘주어진 상황’이었다. 애쓰고 노력할수록 자꾸만 더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참고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쩐지 상황에 지는 듯한 느낌, 포기해버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인내하라는 말은 피해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아야 한다고 해서 무기력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며, 학대나 가혹한 환경을 무조건 견디라는 뜻도 아닙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면서도 우리의 힘을 지킬 수 있습니다. (중략)
피해를 당한다면 일어서서 “이것은 옳지 않아.”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삶이 운명의 수순을 밟아 간다면,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휴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205쪽)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나는 피해자가 될까 봐, 무기력해질까 봐, 그렇게 나의 힘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잠깐 멈추어 쉬는 것, 생이 흘러가도록 기다리는 것, 삶이 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인내하는 것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전의 내 삶은 조금 덜 아등바등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받아들이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치병 진단을 받고 나서 양손을 추켜올리며 “희망이 없어. 난 죽게 될 거야!”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포기입니다. 받아들임은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치료법을 선택해 시도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우리의 삶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포기란 우리가 가진 생명력을 부인하는 것이고, 받아들임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질병에 희생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아는 것은 순종입니다. 상황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포기이며, 그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은 받아들입니다.(217쪽)  


상황에 등을 돌리지 않는 것, 한계를 인정하고 그 상황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 그것 또한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받아들임으로 인해 내면의 평화를 찾고 어떤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는 생을 살아내는 일은,  그것 자체로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마법의 주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일이 와서 상황이 바뀔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일 행복이 가능하다면 오늘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내일 사랑할 수 있다면 오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도 치유의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 순종하면 상황은 기적처럼 변할 수 있습니다. 받는 능력은 바로 이 순종 속에서 가능합니다. 삶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때 우주는 우리에게 운명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합니다. (중략)

평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순응할 때입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때입니다.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고 느낀다면,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싶다면, 순종할 때입니다.(223쪽~224쪽)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순응과 순종은 인간의 힘으로는 바꾸기 힘든 상황을 가정한다. 애쓰고 노력해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삶을 덮치는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상황은 부정한다고 해서 쉬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이나 삶 또한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큰 시험의 결과 또한 나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물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만은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없다.) 이처럼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는 기다리고,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지혜가 된다는 것이다.  



    

미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김진영 선생님이 임종 직전까지 썼던 일기를 모은,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아침의 피아노』에 이런 글이 나온다.           


늘 턱 괴고 앉는 것이 오래된 마음의 습관이었다. 그럴 때 마음은 근심으로 무겁거나 아프거나 외로웠다. 지금 마음은 또 턱 괴고 앉았어도 무겁지 않다. 가볍지도 않다. 꼭 제 무게만큼으로 손바닥 위에 얹혀 있다. 마음이 너무 무거운 건 이미 지나가서 무게도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너무 가벼운 것 또한 아직 오지 않아서 무게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모두가 마음이 제 무게를 잃어서였다. 제 무게를 찾으면 마음은 관대해지고 관대하면 당당해진다.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도록 놓아주고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있는 모양대로 받아들이고 다가오는 것들도 무심하고 담담하게 맞이한다. 지금 깊은 밤 턱 괴고 앉은 마음이 일어날 줄 모르는 건 당당함이 너무 좋아서이다. 하기야 밤이야 아무리 깊은들 어떠하랴.     


이미 지나간 것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의 무게를 지고 사는 삶이 아닌,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도록,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있는 것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죽음을 앞둔 철학자 역시 이야기했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때론 순응하고 순종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내라는 것, 확실치도 않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지 말라는 것, 그것이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마음을 짓누르던 몇 가지 일들을 내려놓는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에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남은 몫은 순리대로 흘러가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지나간 일의 무게와 오지 않은 일의 무게를 내려놓고 닥쳐올 상황과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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