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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03. 2021

『총, 균, 쇠』(재레드 다이아몬드)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생태학자인 저자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근처를 지나던 그곳의 정치가 ‘알리’가 저자에게 던진 이 질문은 『총, 균, 쇠』의 출발이 되었다. (알리의 질문에서 ‘화물’은 백인들이 들어오며 가지고 온 ‘도끼, 성냥, 의약품, 의복, 청량음료, 우산’까지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알리의 질문은 뉴기니인과 유럽 백인의 대조적인 생활양식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 문제를 확대하면 현대 세계에 존재하는 규모가 더 큰 현저한 불균형도 내포하게 된다. 유라시아에서 발원한 여러 민족, 특히 아직도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사는 사람들과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이 현대 세계의 부와 힘을 독점하고 있다. 반면 대부분 아프리카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은 비록 유럽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부와 힘에서는 여전히 훨씬 뒤처져 있다. 또 다른 민족들, 가령 오스트레일리아,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남단 등의 원주민은 자기네 땅을 모조리 빼앗기고 백인 이주민들 손에 살해되거나 예속되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아예 몰살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현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부와 힘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분포하게 되었을까? 예를 들면 어째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유럽과 아시아의 민족들을 죽이고 몰살하지 못했을까?(16쪽 프롤로그 ‘현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의문을 품다’)     



알리의 질문은 곧 ‘불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백인들은 ‘원시적’이라는 이유로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노예로 삼았고, 터전을 빼앗았다. 인종 간의 불평등은 현대까지도 공공연하게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B.C11000~A.D.1500년이 대륙의 발전 속도가 제각기 달라진 시기로 보고, 그 시기에 각 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중 조명했다.

      



알리의 질문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답은 바로 민족 사이에 생리학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종주의에 따른 답으로, 유럽인은 유전적으로 아프리카인보다 지능이 높고,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보다는 더 높다는 전제를 둔다. 이에 따라 각 대륙의 발전 속도에 현저한 차이가 발생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불평등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현대에는 인종주의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공식적인 입장일 뿐이다. 많은 백인들이 암묵적으로 자신들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백인뿐만이 아니다. 아시아계에서도 피부색으로 인한 문제는 여전히 뜨겁다.)     


저자는 인종주의를 ‘역겨운’ 설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러면서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31쪽)이라고 했다. 즉, 지리적 환경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밝혀내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자는 문명의 발전에 대륙간 차이가 생긴 가장 중요한 이유로 식량 생산을 꼽는다. 즉 수렵채집민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정주형 생활인으로의 변화가, 결국 문명의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정주형 생활을 하며 농경을 시작하자, 출산이 수월해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잉여 식량을 저장하게 되면서 기능 전문가 집단(식량 생산을 하지 않는 이들)과 관료나 추장 등의 지배세력(정치 체계)이 생겨났다. 대형 포유류의 가축화가 가능해지면서, 농경에도 큰 보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복 전쟁의 교통수단(예를 들어 말(馬))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활 방식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식량 생산량의 증가는, 결코 유라시아 대륙의 인류가 뛰어나서 얻은 성과가 아니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애초에 다른 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경적 이점이 많았다. 작물화에 적합한 야생식물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으며, 가축화가 가능한 야생동물의 종류도 많았다.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한해살이 식물의 비율이 남다르게 많았으며, 고도와 지형의 변동이 심해 자연환경 역시 다양했다.(환경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점을 바탕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농업은 번성했고, 먹거리 문제가 해결되자 문자, 정치체계 등의 발전이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다.


『총, 균, 쇠』는 그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작물화 가능한 야생 식물과 가축화 가능한 동물군의 상세 예시를 비롯해, 각 지역에서 문자가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파급되었는지, 정치 체계는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기능 전문가 집단에는 어떤 이들이 존재했는지 등.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신빙성 있는 설명을 이어간다. 각종 예시와 수치들을 보면,  어떤 인종이 특별히 뛰어나서 현재의 불평등이 발생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각 대륙이 애당초 보유하고 있던 환경적 자원의 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다른 대륙과 달리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대륙의 축이 ‘동서’ 방향이었다. 이는 아주 중요한 환경적 요인으로, 동서 방향, 즉 가로축으로 대륙이 이어질 경우 대륙 내 위도와 기후가 비슷하게 된다. 이로써 한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발명품이 다른 지역사회로 비교적 빠르게 전파될 수 있다. 또한 이 지대에는 주요 축을 단절할 만한 심각한 생태적 장애물(높은 산이나 사막 등)이 없다. 이 역시 기술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달리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대륙은 대륙의 축이 ‘남북’이거나, 축을 단절할 만한 장애물(파나마 지협이나 사하라 사막 등)이 있었다.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식량 생산에서 앞선 대륙인들은 문명을 발전시켜나갔다. 이 과정에서 ‘총(무기), 균(각종 병원균), 쇠(물질문명)’의 발전 역시 현저히 앞서게 되었다. 이는 끝내 정복 전쟁에 동원되었고, 이로써 대륙 간에 ‘지배-피지배’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유럽인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 수는 두 가지 원인 때문에 크게 감소했다. 첫 번째는 원주민을 사살한 일이다. 유럽인이 뉴기니 고지대로 진출하던 1930년대와 달리 18세기 말이나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인은 그 같은 만행을 크게 꺼리지 않았다. 최후의 대규모 학살은 1928년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원주민 31명을 죽인 일이었다.
두 번째 원인은 유럽인이 들여온 병원균에 있었다. 원주민은 이 같은 병원균에 대해 면역성을 얻거나 유전적 저항력을 진화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1788년 유럽인 정착민이 시드니에 도착한 후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유행병으로 죽은 원주민 시체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원주민을 죽인 질병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수두, 백일해. 결핵 매독 등이었다. (472쪽, 대륙 간 불균형 이론과 원주민이 낙후된 원인)     


인용한 뉴기니 외에도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여러 지역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총과 균, 쇠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균’의 문제는 유럽인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였을 것이다. 원주민 역시 가장 대응하기 어려웠던 원인이었을 것이고. 그저 유럽인이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총으로 직접 사살하는 것이 아니라도) 원주민들은 땅과 삶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니.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리적·생물지리학적 우연(특히 두 대륙의 면적, 축의 방향, 야생 동식물 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역사적 궤적이 달라진 것은 궁극적으로 부동산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579쪽, 아프리카는 왜 흑인 천지가 되었나.)
    

      

작년 말, 올해 독서 목표를 정하면서 『사피엔스』, 『총, 균, 쇠』,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 이렇게 네 권의 과학 도서를 포함시켰다. 언젠가는 읽겠다고 사두었지만, ‘언젠가’가 도무지 오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던 책들이다. 독서는 틈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틈을 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상, 이 네 권을 복직 전에 반드시 읽고 간단하게라도 정리를 하고 싶었다. 방대한 내용이라 구체적으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책이 지향하는 바가 ‘빅 히스토리’라는 점에서, 나 역시 역사의 큰 흐름을 잡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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