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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05. 2021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독일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희생된 순수한 소년의 비극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짓밟는 제도와 교육에 대한 비판    

 

『수레바퀴 아래서』를 설명하는 말들이다. (책 뒤표지에 실린 문구를 인용했다.)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1차적으로 끌렸고, 창의성과 의지를 말살하는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2차적으로 끌렸다. 헤세가 태어난 해가 1877년이라는 것을 떠올려볼 때, 140년이 지나도 교육은 제자리인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헤세가 살았던 ‘독일’은 이제 사정이 좀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간단 줄거리]

‘한스 기벤란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주목받는 뛰어난 학생이다. 학교를 넘어온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한스는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주 시험’에 응시하게 되고, 2등으로 합격한다. 한스 스스로도 친구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 여길 만큼 자부심을 느끼며, 마울브론 수도원에 입학한다.(주 시험에 합격하면 수도원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고향에서 그랬듯이 한스는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한다. 그 결과 좋은 성적을 받게 되고, 여러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 친구들에게까지 인정받는 학생이 된다. 그러던 중  ‘헤르만 하일너’와 친분을 맺게 되는데, 하일너는 선생님들이 정해둔 여러 규칙과 원칙보다 자신의 관심사에 더 집중하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어떤 사건으로 하일너가 ‘금고형’을 받게 되고, 한스는 용기가 나지 않아 하일너를 모른 척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생각하며 자책한다.


얼마 뒤 수도원에서 한 학생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한스는 그 일을 계기로 용기 내어 하일너에게 사과한다. 둘은 전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한스는 점점 공부를 등한시한다. 선생님들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일너는 끝내 수도원을 나가 3일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뒤 돌아오고, 교장 선생님은 하일너에게 퇴교 처분을 내린다.


하일너가 떠난 수도원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한스는 심신쇠약으로 결국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의욕 없이 살던 하일너는 아버지에 의해 기계공의 견습생이 되고, 처음 견습을 하러 간 날 육체노동에서 오는 극심한 피로감에 좌절한다. 다음날 함께 일하던 어린 시절 친구, 아우구스투스가 주급으로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하고, 그 길에 따라나섰다가 이기지 못할 만큼 과음을 하게 된다. 혼자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중, 물에 빠져 죽는다. (스스로 빠진 것인지, 발을 헛디딘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비극’이었다. 읽는 내내, ‘설마…… 설마……’하며 조마조마했다. 한스의 삶이 위태로웠지만, 또 ‘비극’ 임을 애당초 알고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아니었으면 했다. 이미 그전에 한스가 겪어온 모든 과정들이 ‘비극’이었으므로, 그 비극이 회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를 바랐다. 소망은 처참히 무너졌다.

      

3년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선생들과 마을 목사, 아버지, 특히 교장 선생까지도 격려의 채찍질로 한스를 숨 가쁘게 몰아세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우등생이었다. 맨 앞에 우뚝 서있는 한스는 아무도 자기 곁에 다가서지 못하게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다.(64쪽)     


한스는 마을에서 촉망받는 ‘최우등생’이었다. 덕분에 모든 선생님과 심지어 교장 선생님까지 한스의 공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스는 ‘매일 4시까지 계획되는 학교 수업 이외에도 교장 선생이 따로 가르치는 그리스어 수업이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6시에는 마을 목사님이 친절하게도 라틴어와 종교의 복습 강의를 해주었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씩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수학 교사로부터 한 시간에 걸쳐 지도를 받았다.’(12쪽) 한스는 최우등생의 자리를 지키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잠을 아껴가며 공부에 몰두했다.

     

한스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무엇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기 위해 그러고 있는지 몰랐다.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모두의 선망을 받을 만한 결과를 얻자,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낄 만큼 공부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하일너'와 친구가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수업 시간을 자유롭게 이탈하고, 대수를 익히는 대신 시를 노래하는 하일너에게 빠져들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친구의 눈에는 모든 것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이 한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일너에게 추상적인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할 수 없거나 환상의 색깔로 그릴 수 없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고, 그냥 내팽개쳐 버렸다. 그에게 수학은 음흉한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스핑크스에 지나지 않았다. (116쪽)     

하일너와의 우정이 깊어지고, 즐거워져 갈수록 학교는 한스에게 점점 더 낯설게만 여겨졌다. 새로운 행복감이 싱싱한 포도주처럼 용솟음치며 한스의 피와 사상을 꿰뚫고 퍼져나갔다. 이에 비하면, 리비우스나 호머는 빛바랜 하찮은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중략)
선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청년의 발효가 시작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기에 조숙한 소년의 기질에서 나타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애당초 선생들에게는 하일너의 남다른 천재적 기질이 어쩐지 섬뜩하기만 했다.(141쪽~142쪽)     


학교 현장을 떠올렸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에도 하일너와 같은 아이들이, 한 해에 꼭 한 명씩은 있었다. 그 아이들은 교사의 입장에서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통제’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제도권에서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었고, 때로는 그 이유와 논리가 너무도 타당해서 할 말이 없기도 했다.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밤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142쪽)라는 문장 앞에서 별안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여러 명의 ‘멍청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긴 하지만, 특별한 아이들보다는 ‘평범한 아이들’을 원한 것은 사실이었다. ‘특별한’ 아이들은 여러 면에서 피곤했다. 그저 내 말에 쉽게 수긍하고, 의심하거나 되묻지 않는 ‘평범한’ 아이들을 바랐다.     

 

하일너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가 아니었다.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것만 보아도, 하일너는 한스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었을 것이다. 주 시험에 합격을 했으므로 제도권 교육을 따라갈 수 없는 아이도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은 하일너의 천재성을 아까워했다.) 다만 삶과 괴리된 학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고, 학교에서 금지하는 일련의 일들에 의문을 느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맡은 반에 ‘하일너’와 같은 아이가 있다면? 반사적으로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다. 심지어 하일너와 같은 아이로 인해 모범생이었던 한스 같은 아이가 제도권을 이탈하려 한다면? 고개가 저어졌다. 현실의 학교에는 결코 하일너를 품을 수 없다. 그 한 명의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주기엔 입시의 벽이 너무도 높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교과 내용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은 오직 입시를 목적으로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통제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 양만들 말입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중략)
「진정하세요, 기벤라트 씨. 전 그저 학교 선생들을 말한 것뿐이에요.」
「어째서요? 도대체 왜 그렇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와 한스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다. 플라이크 아저씨는 한스가 방학 때도 시간을 쪼개어 공부하는 것을 유일하게 안타까워한 어른이었다. 그는 한스의 장례를 마지막까지 지킨 후,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가 저 아이에게 소홀했다’고.


입시를 지도하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머리와 마음이 동시에 복잡해졌다. 현장에 돌아갔을 때 내게 올 아이들을 상상했다. 그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그 안에서 내가 짊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지 고민스러웠다.      


매번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창의성’, ‘협력’, ‘자기 주도’ 등의 허울 좋은 말들이 난무하지만, 실상은 언제나 5지 선다형 수능에 맞닿아 있다. 변할 듯 변하지 않는 교육 제도 속에서 오늘도 책상머리에 코를 박고 앉아있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왜, 무엇을 위해 ‘공부’라는 것을 해야 하는지 의심조차 하지 못한 채, 시키는 공부만에 몰두하고 있을 아이들을 그려보았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 잘 듣고, 시키는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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