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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01. 2021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연)


정말 그럴까?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은 걸까?

읽은 대로, 느낀 대로 결론지어 보자면, 암과 살아서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 주변에는 암 환우가 없다. 가까운 가족 중에도, 지인 중에도. 그러니 암 환우의 삶을 알 길이 없었고, 더 솔직히 표현하면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 책은 순전히 저자에 대한 애정으로 읽게 된 책이다. 어쩌면 병원을, 어쩌면 숲을 거닐고 있을 그가 지나온 시간이 궁금했다. 내게 ‘암’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그’를 알기 위해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3년 남짓 암과 함께 삶을 떠돈 내 이야기다. 길고 지루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6쪽, 프롤로그 ‘나는 하나의 개체에 불과했다’ 중)     


3년 남짓 암과 함께 삶을 떠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암에 ‘걸려’도 아니고, 암을 ‘진단받아’도 아니고, 암과 ‘함께’라. ‘함께’라는 단어는 대개 애정 어린 대상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었나. 암과 함께 사는 삶은 아니, 암과 함께 떠도는 삶은 어떤 삶일까.           


투병을 핑계로 그렇게 3년 정도 살았다. 어느 날, 내가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생 계획표를 충실히 따르며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과 인정 욕구에 갇혀 그럴듯한 사람이 되려고 어리석게 굴던 내가 보였다.
(중략)
암 환우로 산 3년은 슬프고 우울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웠지만, 사회가, 가정이,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들과 멀어지며 홀가분했다. ‘쓸데없는 짓’만 일삼던 이십 대 초반, 내 본질이 살아있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갔다. 암과 함께한 몇 년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172쪽~174쪽, 쓸데없이 살 걸 그랬어)          


‘인생 최고의 시간’이라고 했다. 암에 걸려 ‘슬프고 우울하고 두렵고 고통스럽던’ 시간이 ‘최고의’ 시간이었다는 말에, 책을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우리는 왜, 생의 벼랑 끝에 서고야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걸까. 삶에 쫓기고 생활에 쫓길 때는 보이지도 않던 ‘나’라는 존재는 왜 항상 그렇게 뒤늦게 툭, 튀어나오는 걸까. 벼랑 끝에 서보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나’를 만났으니, 어쩌면 저자의 표현처럼 ‘인생 최고의 시간’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은 걸까. 그 대가가 너무 큰 것은 아닐까.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암 환우가 되리라고는, 심지어 완치 판정을 받기 전 재발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현실이 되었다. 그 속에서 저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았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 속에서,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만났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삶을 그렸다. 그 삶에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계획 같은 건 무의미했다. 딱 한 문장이면 되었으니까.      


남은 날은 쓸데없이 살아야지! (175쪽, 쓸데없이 살 걸 그랬어)     


하마터면 책을 읽다 말고 환호할 뻔했다.


 ‘쓸데없이’라니!


여기서 ‘쓸데없이’는 가치 없는 삶을 살겠다는 선언은 아니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시간과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돼’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쓸데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늘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던 내게 시원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더 쓸데없이 살아! 가능한 한, 최대로 쓸데없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전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전보다 나은 존재. 울음을 그치고 고민의 방향을 틀었다.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가.(61쪽, 운 날은 많았지만 2)     


저자는 암을 몰아내기 위해 고민하는 대신 남아 있는 삶을 고민하기를 선택했다. 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암 환우라는 이유로 남은 날(고작 의학적 통계를 바탕으로 한)을 통보받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 앞에 남은 생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당장 5분 후에 벌어질 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생이고 삶이다. 물론 생사를 오가는 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확률적으로 조금 더 오랜 시간이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추측’ 일뿐이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삶을 산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인식하며 사는 삶은 드물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정확히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알아내었고 남은 삶을 ‘자신’으로 살고자 했다. 그러니,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다’는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두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살림을 살피는 건 나와 같을 테지만, 고통 속에서 수시로 자신을 마주하고 존재를 확인하는 건 전혀 다를 테니까.          


사람은 거대한 숲이다. 그 숲에 어떤 나무가 자라고, 어떤 오솔길이 있고, 어떤 곤충과 동물이 사는지, 숲의 주인인 나조차 모른다. 숲은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사는 동안 내 안의 숲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내 안의 나무를 얼마나 알아챌 수 있을까? 내 안의 꽃을 얼마나 피울 수 있을까?
세상의 성인들은 입을 모아 ‘사람이 곧 우주’라고 한다. 그 말은 자신을 아는 일이 우주를 아는 것만큼 불가능하다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건 아니었을까. 사람이 주주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고 있는 내 안의 우주와 숲. (167쪽, ‘전부’가 될 수 없는 것들)          


내 안의 숲과 우주를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과연 나의 숲과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내 안에 살고 있는 나무들과 꽃들, 별과 운하는 어떤 빛깔 어떤 감촉일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무와 꽃, 별과 운하가 일시에 모습을 드러내는지 머리와 마음이 바빠졌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아프다던 그가, 자꾸만 나를 바쁘게 하는구나’           




나의 본질은 글쓰기다. 글 쓰고 있을 때 호흡이 돌아오고 맥박이 뛰며 생명의 징후들이 보이고 영혼이 깨어난다. 그 순간 행복과 불행은 감정의 하위 개념이다. 글쓰기는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몰입과 희열로 나를 달군다.      
내 안의 암세포와 공존하며 글 쓰며 살고 싶다. 그게 죽음 앞에서 만난 나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다. (247쪽, 에필로그)          


그의 본질이 닿은 곳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그의 호흡이 돌아오고, 맥박이 뛰며, 생명의 징후들이 보이고, 영혼이 깨어나는’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가 아프다는 말에 별다른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지난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고통 속에서 써 내려갔을, ‘어쩌면 투병기’를 읽으면서도 그의 ‘투병’에는 큰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다만 절박한 생의 ‘기록’에만 마음이 갈 뿐이다.      


언젠가 하늘과 바람이 좋은 날에 그와 숲을 거닐기로 약속했다. 그날이 아주 오랜 후였으면 한다. 나의 아이들이 지금의 그의 아이들만큼 자랐을 때, 그때쯤이면 딱 좋겠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그의 왼쪽 편에 서서 생명력 가득한 숲을 걷고 싶다. 그날까지, 나는 더 ‘쓸데없이’ 살 것이다. 그는 ‘평범하게 행복하고, 평범하게 화내고, 평범하게 슬프고, 평범하게 건강한 사람(106쪽)’으로 더 많은 글을, 또 책을 써주시기를 기도한다.


* 이 책은 브런치 작가 '삶의 촉수'님의 책입니다. 저는 그분의 글을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글로 만난 그분과 저의 인연이 글로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독서노트를 가장하여 그분께 드리는  편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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