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3년 남짓 암과 함께 삶을 떠돈 내 이야기다. 길고 지루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6쪽, 프롤로그 ‘나는 하나의 개체에 불과했다’ 중)
투병을 핑계로 그렇게 3년 정도 살았다. 어느 날, 내가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생 계획표를 충실히 따르며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과 인정 욕구에 갇혀 그럴듯한 사람이 되려고 어리석게 굴던 내가 보였다.
(중략)
암 환우로 산 3년은 슬프고 우울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웠지만, 사회가, 가정이,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들과 멀어지며 홀가분했다. ‘쓸데없는 짓’만 일삼던 이십 대 초반, 내 본질이 살아있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갔다. 암과 함께한 몇 년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172쪽~174쪽, 쓸데없이 살 걸 그랬어)
내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남은 날은 쓸데없이 살아야지! (175쪽, 쓸데없이 살 걸 그랬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전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전보다 나은 존재. 울음을 그치고 고민의 방향을 틀었다.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어떤 존재로 살고 싶은가.(61쪽, 운 날은 많았지만 2)
사람은 거대한 숲이다. 그 숲에 어떤 나무가 자라고, 어떤 오솔길이 있고, 어떤 곤충과 동물이 사는지, 숲의 주인인 나조차 모른다. 숲은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사는 동안 내 안의 숲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내 안의 나무를 얼마나 알아챌 수 있을까? 내 안의 꽃을 얼마나 피울 수 있을까?
세상의 성인들은 입을 모아 ‘사람이 곧 우주’라고 한다. 그 말은 자신을 아는 일이 우주를 아는 것만큼 불가능하다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건 아니었을까. 사람이 주주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고 있는 내 안의 우주와 숲. (167쪽, ‘전부’가 될 수 없는 것들)
나의 본질은 글쓰기다. 글 쓰고 있을 때 호흡이 돌아오고 맥박이 뛰며 생명의 징후들이 보이고 영혼이 깨어난다. 그 순간 행복과 불행은 감정의 하위 개념이다. 글쓰기는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몰입과 희열로 나를 달군다.
내 안의 암세포와 공존하며 글 쓰며 살고 싶다. 그게 죽음 앞에서 만난 나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다. (247쪽,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