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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11. 2021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유성호)

인간의 죽음은 실존적으로 반드시 부딪쳐야 되는 사건이며 우리 주변에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고,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영생이라는 말에 오히려 끌려왔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여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현재 우리의 삶을 더 온전하게 살 수 있다. (2045년, ‘죽지 않는 시대가 온다’ 중)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가 있을까. 당장 나부터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고 시리도록 차갑다.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그 느낌에 그리움이 더해져 슬프고 아프기도 하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를 읽으며 생각했다. 혹시 내가 품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닐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삶을 더욱 가치 있게 살고자 애쓸 수 있을까.          




이 책의 부제는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이다. 부제 그대로 법의학자인 저자가 서울대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개설한 ‘죽음’에 대한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법의학자가 말하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심지어 제목이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라니. 흥미가 당겼다. 겁이 많아 ‘그것이 알고 싶다’도 혼자서는 못 보는 나이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한 교양수업이라니 단순히 범죄만을 다루지는 않으리라 기대했다. 역시, 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책은 1부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남자, 2부 우리는 왜 죽는가, 3부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법의학자인 저자의 부검 사례들이 등장한다. 그렇다 보니 ‘그것이 알고 싶다’의 책 버전 같았다. 저자는 ‘법의학 앞에 완전 범죄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가며, 시체가 온몸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 죽음이 하는 말속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저자의 업(業)이었다. 그로써 죽음이 억울한 이들이 없도록 말이다.      


2부에서는 어디에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여러 논의와 죽음의 다양한 원인과 형태, ‘죽을 권리’와 ‘살릴 의무’, 자살 문제 등이 등장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전문적인 내용이 다루어진 부분이었다. 수정란, 배아, 태아, 출생 이후 중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문제였다. 그렇다 보니 낙태죄, 줄기세포 연구 등 윤리적 문제와 충돌하는 법적, 과학적 문제가 상당했다. (아마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생명의 시작부터 논란이니, 생명의 끝인 죽음도 단순할 리는 없었다. 죽음의 분류부터도 ‘세포사, 장기사, 개체사, 법적 사망의 단계’까지 무척이나 다양했다. 죽음의 원인은 크게 병사, 외인사(자살, 타살, 사고사), 불상으로 세 가지이지만, 그 세 가지 중 한 가지로 명확하게 진단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2부는 법의학자가 바라본 ‘죽음’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라 조금은 딱딱하게 느껴진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에 전혀 알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아주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부분은 3부였다.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일주일에 한 번씩, 평범하지 않게 죽어간 이들을 만나러 가야 하는 법의학자가 말하는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종활’이라는 의미의 신조어 ‘슈카스’가 몇 년 전부터 유행해오고 있다고 한다. ‘슈카스’는 일본 노인들이 인생의 종말을 충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벌이는 죽음 준비 활동을 뜻한다. 독신 노인의 장례 절차와 유품 처리, 유언 등을 적는 공책인 임종 노트나 생전 장례 등 다양한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불현듯 벌써 십 년도 더 전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던 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 장의 사진을 더 찍으셨던 기억이 났다. 두 분의 영정사진으로 쓰기 위한 준비였다. 물론 두 분이 원하셨던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영정사진에 쓰기 위한 사진을 찍겠다고 하셨을 때, 너무 놀라고 슬펐던 기억이 난다. 아직 건강하실 때였는데, 왜 죽음을 떠올리시는지. 그냥 준비해두는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 그 모습이 더 슬퍼서 두 분이 증명사진을 찍는 모습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결국 그때의 사진은 2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영정사진으로 올랐고, 친정집에는 그날의 할아버지가 사진 속에 계신다.     


이제야 그 사진을 보면서 그래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이렇게 멋진 사진 한 장 남겨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뒤로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피부도, 안색도, 눈에 띄게 안 좋아지셨는데 그 사진 속의 할아버지만큼은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라 볼 때마다 위안이 된다. 그런 것을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미루고 미루며, 가능한 한 모른 척해야 할 일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삶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을 재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지금 건강할 때 죽음을 준비해두어야 한다. (중략)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삶이 있고 100가지의 죽음이 있는 것이다. 나만의 고유성은 죽음에서도 발휘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과 친숙한 삶이야말로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삶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삶을 묻는 이유다. (‘장례식장에서 탱고를’ 중)          


근래에 읽은 책들에 유난히 ‘죽음’을 소재로 한 책이 많았다. 『인생 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아침의 피아노』(김진영) 등이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소재로 삼고 있었다. 이 책들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는 그보다 더 전면적으로 ‘죽음’을 다룬 책이었다. 매주 다른 죽음을 만나는 법의학자의 시선에서 고찰한 ‘죽음’은, 마냥 두려워하고 혐오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 시기는 어떤 능력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 항상 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보다 나은 죽음(웰 다잉)을 꿈꾸는 일이 낯설지는 않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전해졌다.   

   



저자가 소개한, 아주 인상적인 죽음 하나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죽음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자기 삶의 마지막 여정을 스스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도 언젠가 찾아올 ‘죽음’과 그리 나쁘지 않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촌수필』이라는 좋은 작품을 한국 문학사에 남긴 소설가 이문구 선생을 많이들 기억할 것이다. 이문구 작가는 2003년 2월에 위암 말기 통보를 받고는 곧바로 자신이 사람들에게 빚지고 안 갚은 것이 있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3년 전 계약하고 인세까지 미리 받았던 동시집 원고를 서둘러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 신신당부한다.      

'내가 혼수상태가 되거든 이틀을 넘기지 마라. 소생하지 않으면 엄마, 동생 손잡고 산소호흡기를 떼라. 절대 연장하지 마라. 화장 후에는 보령 관촌에 뿌려라. 문학상 같은 것 만들지 말고 제사 대신 가족끼리 식사나 해라. 나는 이 세상 여한 없이 살다 간다.' ('장례식장에서 탱고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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