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이토록 고요한 소란스러움

by 진아

비가 온다. 며칠째 쨍하게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렵다. 멀리 보이던 산자락은 흐린 구름에, 옅은 안개에 자취를 감추었다. 여름날과 묘하게 어울리는 서늘함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반발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이 살짝 시리다. 따듯한 차 한 잔을 쥐면 차갑던 손가락 마디마디에 단숨에 온기가 퍼진다.

한 모금 꼴깍,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듯함에 잠깐, 몸이 떨린다.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울린다.

이토록 고요한 소란스러움.

참 좋다.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애써 차려입은 옷자락이 젖는 것도, 오래 신은 운동화의 이음새 틈으로 질퍽한 비가 밟히는 느낌도 싫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도, 축축 처지는 기분도, 자꾸만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육체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빗소리에 너와 나의 목소리가 묻히는 순간도, 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흩날리는 것 또한 마땅찮았다.


쨍하게 맑은 날을 기다렸다. 햇살이 그림자조차 만들지 못하는 시간을 사랑했다. 입고 나간 옷자락 끝에 볕이 대롱대롱 매달려 빛을 내는 순간을 사랑했다. 오직 너와 나의 목소리로 공기를 가득 채우는 순간을, 밝고 선명한 시야 아래 갓 망울 터트린 꽃잎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나의 존재가 흐릿해지던 날이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안 그래도 힘든 몸과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처졌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 함께 좀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아이는 잠투정을 많이 했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보아도 아이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말 못 하는 아이와 나, 둘만 남겨진 집안은 적막했다. 빗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와 뒤섞여 견딜 수 없는 소음처럼 느껴졌다. ‘네가 잠들지 않으면 엄마도 쉴 수 없어’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원망 섞인 말을 토해냈다. 아이는 보란 듯이 더 크게 울었다.


아이를 아기띠에 안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아이에게 비를 맞힐까, 평소에는 무겁다고 들지도 않던 장우산을 들고나갔다. 아기띠도 싫다며 발버둥 치던 아이는, 밖으로 나가자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우리는 우산 하나를 쓰고 빗소리를 들었다. 걷고 또 걸었다. 아이는 언제 투정을 부렸나 싶게 천사처럼 잠이 들었다. 빗소리에 내 소리를 숨겨 울었다. 아이의 작고 맑은 얼굴 위로 눈물방울이 비처럼 똑똑 떨어졌다.


빗소리의 템포에 맞추어 마음이 고요해졌다. 처음으로 비에 젖은 세상을 보았다. 흐리다고 생각했던 세상에는 생기가 넘쳤다. 갓 심은 듯한 키 작은 나무 묘목들은 전날보다 한 뼘쯤 자란 듯했다. 초록은 물기를 머금어 더 선명한 초록이 되어가고 있었다. 꽃잎 위로 또르륵 빗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쨍한 소리가 날 것 같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빗방울은 흔적도 없이 다른 빗방울을 만나 땅으로 스며들었다. 흐릿하던 아스팔트는 선명하게 채색되었고, 꽃가루에 얼룩졌던 가게의 간판들도 깨끗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비는 이미, 내가 알던 그 비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비를 기다렸다. 비만 오면 아이를 아기띠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같이 빗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작은 손끝을 잡고, 우산 밖으로 살짝 내밀어 비를 느꼈다. 너무 많이 오는 날에는 그럴 수 없어서 거실 창 앞에 앉아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물방울로 흔적을 남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또르륵 물방울이 굴러 저희들끼리 모이는 것을 보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따스한 집안과 서늘한 바깥의 공기가 만나는 유리창에 ‘하아-’ 입김을 불어 그림도 그렸다. 동그라미 네모, 하트, 별….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는 낮잠을 더 길게 잤다. 아이가 잠든 집안은 원래도 고요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유난히 더 그랬다. 고요를 삼킨 거실은 그대로도 편안했다. 더 바랄 것이 없었고,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책의 접어둔 페이지를 다시 열어 보며 고요를 누렸다. 요란하게 울리는 빗소리가 싫지 않았다. 빗소리를 메트로놈 삼아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아이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깬 아이의 목소리도, 밉지 않았다.




비를 좋아하지 않던 내가 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서른이 넘어 이전까지 싫어하던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비는 더욱 특별하다. 뒤늦게 애정을 드리우게 된 너를, 오래 사랑할 것 같다.


오늘도, 사랑하는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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