풉,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질 만큼 힘을 주는 데에도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첫째가 요즘 들어 부쩍 그랬다. 아무래도 집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운동량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원인일 것이다.
첫째가 변기에 동그랗게 앉아 “노력해볼게!”라고 결연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런 단어를 쓸 만큼 컸구나 싶어 대견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노력'이라는 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제일 예뻐 보이는 아이들은 ‘노력형’ 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 발표를 잘하는 아이, 제 할 일을 잘하는 아이는 물론이고 종종 말썽을 부리는 아이도 내 품에 들어온 이상은 다 예뻤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자꾸 마음이 더 가는 아이들은 ‘노력형’ 아이들이었다. 노력하는 아이가 잘하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애쓰고 노력하는 데에도 목표한 바에 닿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저만큼 노력하면 응당 그만큼의 결과는 얻었으면 싶은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하지만 노력형 아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쉽게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쌤! 좀 더 해볼게요!”
“쌤! 이번에는 진짜 더 노력해볼게요!”
아이들의 그 말들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교사용으로 제공된 문제집을 다른 아이들 몰래 건네주기도 하고, 함께 공부 계획을 세워 플래너를 만들기도 했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미 너무도 잘 아는 나이었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주변에 노력형 아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도리어 궁색해 보이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말을 듣고야 말았다.
수업에 참여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나쁜 아이였나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대단히 해맑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사각사각 연필심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교실에서 유일하게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는 반쯤 몸을 엎드린 아이였다. 아이 옆으로 갔다. 내가 가까이 가자 아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세우고 펜을 들었다. 하지만 활동지는 모두 빈칸이었다. 아이 자리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활동지가 다 빈칸이네. 너 진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어쩌려고 그래?”
“쌤, 저는 졸업장만 있으면 돼요. 엄마가 엄마 가게 물려준대요.”
그 대답에서 받은 충격이 아직도 여전히 얼얼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주변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우와, 좋겠다.”
“나도 울 엄마가 가게 같은 거나 했으면!”
정말 이건 뭐지 싶었다. 아이들이 목소리가 새 나가 순간적으로 교실이 소란해졌다. 비단 몇몇 아이들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때 실제로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의 상당수가 그런 반응이었다. 애쓰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는 것보다, 부모님이 가진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그 분위기에 나는 잠깐 압도되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보니, 언젠가부터 ‘노력하겠다, 노력해보겠다’라는 말을 하는 아이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노력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번 실패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과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노력한다고 했다가 나쁜 결과를 맞이했을 때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일찌감치 알아버린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얘들아, 어차피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분명히 있어. 하지만 그러니 애당초 포기해버리는 삶과 그럼에도 애써보는 삶은 분명히 다를 거야.”
아이들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조금 더 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기에 그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일순간 조용해졌고, 한동안 우리는 함께 침묵했다.
“샘은 노력해서 뭘 얻었어요?”
침묵을 깨던 목소리, 너무나 귀한 질문이었다. 나는 살면서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여기는 것들을 몇 가지 말해주었다. 물론, 죽을 만큼 노력했어도 얻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히 배운 것도 있다고 했다.
몇 명의 아이들은 내가 말하는 동안 딴짓을 했고, 몇은 하품을 했다. 하지만 그 몇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이들의 마음에 결코 가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면서도 나는 말했다. 그때는 그게 문법 지식 하나를 더 가르치고 시 한 편을 더 분석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나 스스로를, 죽어라고 노력하면 대체로 그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를 얻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니 내 삶의 동력은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는 내게 ‘정말 부지런하다’고, 또 누군가는 ‘닮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뭐하러 그렇게 애쓰며 사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단언컨대 나는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고, 닮을 구석보다는 닮지 않아야 할 구석이 더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뭐 하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나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좋을 뿐이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을 노력이라 칭할 뿐이다. 애초에 ‘뭐 하려고’, 애써 부지런히,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서 정신없이 뛰어들다가 무언가를 얻는 일들이 생기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의 두 아이가 적어도 엄마 아빠를 믿고 까부는(?) 인생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나와 신랑은 물려줄 재산도 없고, 훗날 재산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긴다 한들 물려줄 생각도 없다. 그저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고 몰두하여 ‘노력’하는 삶의 자세뿐이다. 그로써 무언가를 얻기도, 잃기도 하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키워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오직,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