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May 21. 2021

『아무튼, 인기가요』(서효인)

『아무튼, 목욕탕』 이후로 두 번째 읽는 ‘아무튼’ 시리즈다. 두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아무튼’ 시리즈에서 받는 가장 강력한 느낌은, ‘부러움’이다. 목욕탕이나, 인기가요나, 저자들은 이른바 ‘덕후’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확고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래서 마음에 찬바람 드는 날이면 확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부러웠다. 심지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할 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원래도 우리 민족은 흥이 많고, 음주가무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하지 않던가.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예능에서 ‘음악’이 소재가 되면 실패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우리 민족에게는 음악을 사랑하는 DNA가 탑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노래방과 그것도 모자라 오락실 노래방에 이어 코인 노래방까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우리와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18번’, ‘애창곡’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아무튼, 인기가요』의 저자 역시 대중가요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고, 대중가요를 격하게 사랑하는 이였다. 본업이 시인이라고 하시던데, 그래서인지 문장이 굉장히 짧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시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다. 재치 있는 표현들과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된 듯한 문장들은, 오랜만에 무언가를 읽는 시간 내내 쿡쿡거리며 웃게 만들었다. 요즘 너무 힘든 책들을 붙잡고 있어서 머리가 좀 아팠는데, 확실한 환기가 되었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박남정과 카세트테이프의 시절부터, 지금으로 내려와 오마이걸과 스트리밍 서비스, 유튜브 무한 재생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대중가요와 함께 살아온 저자의 세월을 읽으며 때론 웃고 때론 (아주 조금) 슬펐다. (물론 저자는 슬픈 이야기도 슬프게 쓰지 않았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저자만큼의 음악적 스펙트럼은 아니라서 아이돌 이야기에는 격한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저자가 콕콕 집어주는 Play List가 낯설지는 않았다. 비슷한 세대를 살아온 저자와 나의 음악적 취향을 비교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읽는 내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땐가, H.O.T가 데뷔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젝스키스가 데뷔를 했다. 이어서 S.E.S와 핑클이, 신화와 GOD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때에는 지금만큼 많은 수의 아이돌이 존재하지 않던 때라, 가요계는 거의 양강 구도이던 시기가 많았다. 경쟁그룹의 팬들끼리는 신경전도 살벌할 정도였는데, 돌이켜 보면 나는 특별히 어떤 그룹에게도 큰 애정을 쏟지는 않았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젝스키스보다는 HOT, 핑클보다는 SES, 신화보다는 GOD였는데, 뭐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열렬한 팬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20살 이후로도 특별히 좋아한 가수는 없었다. 자주 얼굴을 비추는 이들에게 잠깐씩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 그런 나라도 플레이리스트에서 빼놓지 않는 음악은 있다. 바로 성시경과 김광석의 음악이다. 생에 유일하게 내 돈 써서 가 본 콘서트가 성시경 콘서트였다.(성시경에 대한 관심은 극도로 낮으나, 성시경의 음악만큼은 열렬히 사랑한다.) 성시경 노래라면 데뷔곡 ‘내게 오는 길’부터 각종 드라마 영화의 OST까지 가릴 것 없이 사랑한다. 심지어 그의 몇 안 되는 댄스곡(?)까지도! 김광석은 사실 내 세대의 뮤지션이 아니라 좀 생뚱맞은 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노래를 뽑아보라면 그의 음악을 고르고 싶을 만큼 그의 노래를 너무도 사랑한다.  

   

계기는 스무 살, 새내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는 자유로움과 대학에 대한 낭만을 품고, 대학 입학도 전에 오리엔테이션의 개념이었던 ‘예비대학’에 갔다. 3일 일정 중 심지어 마지막 날은 1박 2일이었다! 허락받은 외박에 적당할 정도의 알코올까지, 기분과 감수성이 한껏 고조되었던 그때, 바로 그곳에서 예비역 선배들의 공연을 통해 김광석의 노래를 처음 만났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날들’, ‘기다려줘’, ‘서른 즈음에’ 등, 김광석의 숱한 명곡들을 그 자리에서 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들어온 노래들과는 어딘지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 노래를 들으며 나도 함께 다른 차원으로 성큼 뛰어오른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그 선배들이 심각하게 노래를 잘하기도 했다. 03학번인 내게, 97학번이었던 그 선배들은 거의 조상급(?)으로 보이던 때였는데,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는 영화배우 뺨치게 멋있어 보였으니 할 말 다했다. (97학번이면 그 선배들은 당시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는데, 너무 늙은이(?) 취급했던 것 같아 이제 와 새삼 미안하다.)     


아무튼, 그 후로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반드시 김광석의 노래가 몇 곡쯤은 들어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와 ‘변해가네’, ‘나의 노래’가, 마음이 시린 날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와 ‘기다려줘’, 비 오는 날이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 사랑했지만’, 그냥 김광석 노래가 듣고 싶은 날에는 가사와 분위기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곡 무한 반복 재생…….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첫사랑도 떠오르고, 철없던 이십 대 초반의 치기 어린 나도 떠오르고, 임용을 준비하며 참 버겁던 시간들도 떠오르고, 그 외에도 숱하게 많은 외롭던 날들, 그리운 순간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요즘은 김광석 노래의 재생 횟수를 누르는 이가 한 사람 생겼는데, 바로 ‘폴 킴’이다. 일단 가수가 ‘폴 킴’이면 무조건 믿고 듣는다. 김광석의 목소리와 폴 킴의 목소리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그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마음은 한결같이 편안해진다. 폭풍 치던 마음에 금세 잔물결이 일어나니, 요즘처럼 자주 폭풍 치는 때에는 수시로 마음의 처방전 삼아 들어줘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있을 것이다. 날씨에 따라, 마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목소리가 혹은 음악 장르가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조금은 어두운 거실에 앉아, 고요히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실 조금 전까지는 이름 모를 피아노 연주곡을 듣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김광석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만 같아서 급하게 바꾸었다.)      


위로가 되는 목소리를, 노래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참 살 만한 곳 같다. 내게 그런 목소리가, 노래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귀로 들은 만큼 글로 쓴 것들도 훌륭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능력 바깥의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그때 당신이 좋아하던 노래를. 지금까지 좋아하는 노래를. 어제오늘 새롭게 알게 된 노래를. 노래 이야기를 하면 시커먼 밤도 새하얗게 샐 수 있다. 당신과 하루 정도는 그랬으면 좋겠다.(에필로그)


당신에게는 그런 목소리가, 노래가 있는지. 묻고 싶은 밤이다.



그날도 나는 듣고 있으려고 한다. 그게 무엇이든, 무엇으로 틀든, 누가 인기고 어떤 게 유행이든 상관없이 계속 듣고 있을 것이다. 노래는 이렇게 계속해서 변하는데, 변함없이 그대로다. 3분의 세계가 시작하는 순간은 늘 처음인 것도 같다. 반복되는 처음이라니, 이거 꽤 근사하잖아? 이런 근사함의 세계는 그저 즐기면 그만인 것을, 감히 즐기다 못해 글을 쓴다.(프롤로그)     

호르몬의 문제일까. 종종 뜬금없이 운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미니 앨범 《Love Poem》의 리스트는 복되고 영롱했다. 특히 <시간의 바깥>은 눈물이 나도록 좋았다. 이런 문장은 보통 은유법이거나 과장에 불과해야 맞을 텐데, 운전대를 잡은 채로 충혈되는 눈을 내버려 둔 것이다. 이유 없이 울고 싶은 날도 있지. 그날이 오늘이라고 이상할 일은 아니겠지. 오늘 같은 날이 매일이라 해도 삶은 어색할 일 없다. 사는 일은 우는 일에 가깝다. 달라질 건 없다. 슬픔은 다시 차오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울지 않는다면, 오늘과 다를 것 없을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얻기 힘들 것이다. 울지 않는다면, 차오르는 슬픔을 덜어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울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무도 울지 않는다면.(시간의 바깥에서 만나)     

노래가 없으면 그날도 없었다. 노래는 노래지만, 이렇게 노래는 지난 삶 그 자체가 되어 실존한다. 그리고 여름이면 어김없이 떠올라 괴이한 주술을 부린다. 어쩔 수 없게 홀린 듯 그 주문에 따라, 여름 며칠 견뎌보는 것이다. (여름 노래를 기억하고말고)     

가요는 계절감을 포함하여 날씨라고 할 만한 것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그 계절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고, 덥거나 춥거나 첫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거나 심지어 쨍하니 맑은 날도 마찬가지다. (중략) 노래는 날씨다. 날씨는 노래가 된다.(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 목소리를)     

노래를 듣는 동안이나마 우리는 가까스로 희망을 품는다. 사랑도 하고 이별도 겪는다. 겨우 3분 동안. 무려 3분이나.(에필로그)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는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다』(인디고 서원 엮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