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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27. 2021

『아무튼, 반려병』 (강이람)

아무튼 시리즈에 ‘반려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병’이라는 단어는 기존에 읽어온 아무튼 시리즈와도 괴리감이 컸지만, 그 앞에 붙은 ‘반려’와는 더욱 그랬다. 대개 ‘반려’ 뒤에 붙는 단어들은 애정이 담뿍 담긴 것들이 아닌가? ‘반려견, 반려묘, 반려식물, 반려자……’ 애정을 품고 함께 생을 살아가는 것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반려'가 ‘병’ 앞에 붙어 있으니 어딘지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구나 건강한 삶을 원한다. 새해 소망 인터뷰를 보면, 열에 아홉은 ‘가족 모두 건강하고-’로 시작한다. 오죽하면 내 주변에 태명이 ‘건강이’ 혹은 비슷한 맥락의 ‘튼튼이’였던 아가들이 몇이나 된다. 그만큼 ‘병’은 누구나 피하고 싶고, ‘건강’은 누구나 지키고 싶은 것이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다.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도 결코 없다. 아픔과 병은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만큼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결코 선택하지 않는 것이자, 선택할 수 없는 것이지만, 책임은 오롯이 내 몫이다. 아픔 몸을 이끌고 일을 해야 하고 학업을 이어야 하고, 삶을 살아야 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골골이’라고 칭할 만큼 수많은 ‘잔병치레’를 겪어온 이다. 감기와 장염, 위염과 식도염, 치열과 디스크, 수족냉증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잔병’을 겪었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자신의 생을 지배해온 온갖 ‘병’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왔다고 말한다. (저자가 겪은 병들을 잔병으로 봐도 될지 모르겠으나, 저자는 생사를 오가는 병은 아니라는 점에서 자신의 병을 잔병으로 정의했다.)     


‘아무튼 시리즈’가 표방하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는 대개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한 취미, 관심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각종 잔병들이 ‘나를’ 선택해왔다. 재작년에도 골골거렸는데, 작년에도, 올해도 비슷비슷하게 계속 아팠습니다, 라는 경험치가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혹은 의도해서 만든 능동적인 세계가 아닌, 잔병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태의 세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인생의 ‘아무튼’을 논하자면 이 수동태의 세계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프롤로그)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골골이다. 요즘은 그나마 덜 아픈 편이지만(아마도 아플 시간이 없어서 안 아프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한때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마저 어색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기 어렵다….      


환절기를 비롯하여 겨우내 감기를 달고 살고, 소화불량은 일상다반사다.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은 이제 내게도 ‘반려병’의 경지에 오른 잔병이다. (임용 시험을 준비할 때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위염을 지나 위궤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불면증은 지금도 가끔씩 찾아오는 반려병이고, 아이를 출산한 후부터는 허리와 무릎이 별 이유도 없이 아프다. 얼마 전에는 쉬어버린 목소리가 도무지 돌아오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찾았더니 ‘성대결절’이라고 했다. (저 가수 아닌데요? 웬 뜬금없는 성대결절?) 체력이 하도 떨어져서 한약을 한 재 먹으려고 한의원에 갔더니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한의사분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음… 맥이 잘 안 잡히네요. 맥이 너무 약해요.”라고. 이제 하다 하다 맥까지 약하구나.     


그래서 『아무튼, 반려병』을 읽는 내내 더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진짜 이렇게 자주 아픈 사람이 있다고?’ 싶을 만큼 낯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진짜 이렇게 아프지. 맞아, 그랬지.’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몸이 자주 아프다 보면, 나 스스로도 ‘또 아픈 거야?’, ‘설마 또?’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느 순간을 지나게 되니 남편에게도 더 이상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민망하다. 어제까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파스를 붙여달라고 했는데, 오늘부터는 뜬금없이 목이 붓는 식이니, 뭐 내내 약 먹고 파스 붙이다 볼일 다 볼 판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자꾸만 아픈 것을 참게 되었다. 참고 참다 보면, 참아지는 통증들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통증들도 있지만. 가능한 범주 내에서는 아파도 안 아픈 척한다. 내 병을 내가 모른 척하는 것이다.

    

나는 내 몸의 아픔을 원하지 않는데 내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아플 때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아플 때 나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아픈 자신’이 아니라 ‘아픔을 견디는 자신’이다. 아픔으로 인해 단수로서의 나는 복수화된다. 스스로에게 ‘나 또 아프네?’가 아니라 ‘너 또 아프냐?’라고 따져 묻는 것이다. 아픈 몸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염증과 싸우고 있기에(그래서 열도 나고, 몸이 붓고, 기침을 하고, 눕고 싶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 질책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건강하고 싶은 목표는 같지만, 아픈 나와 아픔을 겪는 나 사이에 입장 차가 있는 것이다. (중략)
아픔 몸과 팀워크를 이루는 것이 병을 대처하는 기본자세임을 몇 년간의 골골이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 이후로 어딘가 아프면 주문을 외워본다. 고생이 많아, 잘하고 있어, 고마워.(골골거리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만 아픈 나와 자아 분리를 하는 게 아니었어!’ 그동안 내가 나에게 가혹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 스스로도 나의 아픔을 받아들이지 않고, ‘너 또 아프냐?’고 질책하던 시간들. ‘아픈 나’ 대신 ‘아픔을 견디는 나’만을 사랑하던 시간들. 그래서 내가 그랬던 거구나.      

여기서 변명을 하나 하자면, 내가 아픈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데에는 숱하게 들어온 이 말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요즘 애들은 너무 나약해.”

“그 정도 아픈 건 참아야지.”

“맨날 아프다는 핑계로 어쩌고저쩌고…….”     


몸의 아픔을 정신의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선 속에서는 자주 아픈 사람은 설 자리가 별로 없다.      


사실 건강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100점을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병을 이기다(beat)’, ‘병마와 싸우다(fight)’라는 표현 때문인지 자꾸 건강이란 ‘이겨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플 때마다 늘 낙방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일 테다.(중략)

건강이 내게서 멀어질 때 내가 느끼는 감각은 이긴다/진다가 아니라 ‘견딘다’, 혹은 ‘기다린다’에 가깝다. 마치 장대비가 쏟아지면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는다)     


‘이겨내야 한다’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 동안, 정작 단 한 번도 승리의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병은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내 몸에 병이 온 것은 그저 몸이 보내는 신호였을 따름이다. 견디고 기다리며, 몸에게도 나에게도 시간을 주는 것이다. 조금 더 여유롭게, 그리고 느긋하게.      




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으며, 배출할 것은 배출하고 몸에 남길 것은 남기는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이 유기적으로 합쳐진 결과가 ‘건강’이다. 내 경우는 그 과정에 종종 오류가 있었고 그래서 몸에서 당연하게 여길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아픔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무관심과 무례함을 깨우는 사이렌과도 같다. 스스로 옷을 골라 입고, 화장실에서 제때 볼일을 보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소화할 수 있으며, 자고 싶을 때 잠이 드는 일에 깊이 감사하게 된 것은 골골거려온 내 일상이 맺은 열매이다. (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는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하도 자주 아프다 보니, 아프지 않은 날들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순간이 많다. 숱한 ‘오류’를 겪으며,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 순간인지 깨닫는 것은 ‘골골이’들의 특권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골골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우리의 아픔이, ‘잔병’이라는 것들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님을. 내 몸의 신호에 조금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나약한 정신’의 산물은 아님을. 우리는 ‘골골거리는’ 시간을 통해서 건강한 순간을,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조금 더 특별하게 느낄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임을 잊지 않기를.     


더불어, ‘나는 아픈 일이 잘 없어! 그렇게 자주 아프다니, 이해가 안 돼.’라고 말하던 이들에게도 조심스럽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을 우리의 시간에, 우리는 진심으로 아파 왔고 최선을 다해 견뎌왔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위로를 가장한 비난은 거두어 달라고.          


* 리뷰에서 다 담지 못했지만, 책에는 생사의 문제가 달린 중병에 걸린 선배를 대하는 저자의 마음과 아이가 아플 때면 1+1의 아픔을 느끼는 부모의 마음,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인이 병에 대한 공포에 빠진 지금의 현실 등 다양한 ‘병’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골골거리는 사람들은 매번 아플 때마다 인생의 진리 앞에 마주 서는 사람인 것이다. 뭐든 끝까지 가면 깨우침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지독한 이별로, 누군가는 치열한 공부로, 누군가는 빡센 육아로 인생을 배운다면 내 경우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골골거리는 것으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내 인생의 FAQ-또 아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어 반발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앓아눕게 되면 제 발로 자기반성의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찾다 보면 뭐라도 반성할 거리들이 나오기 마련이다.(‘왜’냐고 물으신다면)     

빈티지(vintage)란 원래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 해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빈티지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중략) 오직 시간을 관통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데에 차별점이 있다. 표피만 오래된 느낌을 내서는 결코 그 맛이 안 나는데 그건 골동품(骨董品)이라는 말에 들어간 ‘뼈’를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오래되었다,라고 하려면 적어도 뼛속까지 그 세월이 깃들어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 언니의 나이 듦을, 그리고 나의 나이 듦을 괜찮게 받아들이고, 유영하듯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주름지고, 퇴색하고, 갈라지고, 골골거리게 될 때마다 ‘음, 뭐 잘 숙성되어가는군’ 생각하면서.(당신의 빈티지)     

살면서 우리가 견뎌내야 할 것은 아픔만이 아니다. 나의 작은 키, 부족한 기억력, 잊히지 않는 그 애와 이별, 미친 듯한 업무 일정, 배우자와의 좁혀지지 않는 생활 습과, 가족 간의 갈등까지……. 우리는 늘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견디며 살아간다. 환자라는 말은 나를 비정상적인, 임시적인 범주로 내쫓는 것 같지만, 견디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픔을 누구나 살아내고 있는 일상의 범주로 초대해주는 것 같다. 아플 때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에게 주어진 계절을 그 나름대로 견뎌낼 용기를 준다.(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는다)     

아무튼, 아픔 때문에 아픔을 들여다볼 시간이 생겼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혹은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아픈 시간들 때문에 분주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멈춰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아픔과 반려하는 나만의 자세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캘린더 일정에는 없는, 이름 없는 그 긴 시간들을 여기 이 작은 책에 기록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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