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가 표방하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는 대개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한 취미, 관심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각종 잔병들이 ‘나를’ 선택해왔다. 재작년에도 골골거렸는데, 작년에도, 올해도 비슷비슷하게 계속 아팠습니다, 라는 경험치가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혹은 의도해서 만든 능동적인 세계가 아닌, 잔병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태의 세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인생의 ‘아무튼’을 논하자면 이 수동태의 세계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프롤로그)
나는 내 몸의 아픔을 원하지 않는데 내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아플 때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아플 때 나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아픈 자신’이 아니라 ‘아픔을 견디는 자신’이다. 아픔으로 인해 단수로서의 나는 복수화된다. 스스로에게 ‘나 또 아프네?’가 아니라 ‘너 또 아프냐?’라고 따져 묻는 것이다. 아픈 몸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염증과 싸우고 있기에(그래서 열도 나고, 몸이 붓고, 기침을 하고, 눕고 싶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 질책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건강하고 싶은 목표는 같지만, 아픈 나와 아픔을 겪는 나 사이에 입장 차가 있는 것이다. (중략)
아픔 몸과 팀워크를 이루는 것이 병을 대처하는 기본자세임을 몇 년간의 골골이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 이후로 어딘가 아프면 주문을 외워본다. 고생이 많아, 잘하고 있어, 고마워.(골골거리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
사실 건강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100점을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병을 이기다(beat)’, ‘병마와 싸우다(fight)’라는 표현 때문인지 자꾸 건강이란 ‘이겨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플 때마다 늘 낙방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일 테다.(중략)
건강이 내게서 멀어질 때 내가 느끼는 감각은 이긴다/진다가 아니라 ‘견딘다’, 혹은 ‘기다린다’에 가깝다. 마치 장대비가 쏟아지면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는다)
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으며, 배출할 것은 배출하고 몸에 남길 것은 남기는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이 유기적으로 합쳐진 결과가 ‘건강’이다. 내 경우는 그 과정에 종종 오류가 있었고 그래서 몸에서 당연하게 여길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아픔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무관심과 무례함을 깨우는 사이렌과도 같다. 스스로 옷을 골라 입고, 화장실에서 제때 볼일을 보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소화할 수 있으며, 자고 싶을 때 잠이 드는 일에 깊이 감사하게 된 것은 골골거려온 내 일상이 맺은 열매이다. (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는다)
골골거리는 사람들은 매번 아플 때마다 인생의 진리 앞에 마주 서는 사람인 것이다. 뭐든 끝까지 가면 깨우침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지독한 이별로, 누군가는 치열한 공부로, 누군가는 빡센 육아로 인생을 배운다면 내 경우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골골거리는 것으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내 인생의 FAQ-또 아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어 반발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앓아눕게 되면 제 발로 자기반성의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찾다 보면 뭐라도 반성할 거리들이 나오기 마련이다.(‘왜’냐고 물으신다면)
빈티지(vintage)란 원래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 해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빈티지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중략) 오직 시간을 관통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데에 차별점이 있다. 표피만 오래된 느낌을 내서는 결코 그 맛이 안 나는데 그건 골동품(骨董品)이라는 말에 들어간 ‘뼈’를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오래되었다,라고 하려면 적어도 뼛속까지 그 세월이 깃들어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 언니의 나이 듦을, 그리고 나의 나이 듦을 괜찮게 받아들이고, 유영하듯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주름지고, 퇴색하고, 갈라지고, 골골거리게 될 때마다 ‘음, 뭐 잘 숙성되어가는군’ 생각하면서.(당신의 빈티지)
살면서 우리가 견뎌내야 할 것은 아픔만이 아니다. 나의 작은 키, 부족한 기억력, 잊히지 않는 그 애와 이별, 미친 듯한 업무 일정, 배우자와의 좁혀지지 않는 생활 습과, 가족 간의 갈등까지……. 우리는 늘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견디며 살아간다. 환자라는 말은 나를 비정상적인, 임시적인 범주로 내쫓는 것 같지만, 견디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픔을 누구나 살아내고 있는 일상의 범주로 초대해주는 것 같다. 아플 때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에게 주어진 계절을 그 나름대로 견뎌낼 용기를 준다.(자랄 것은 자라고 자라지 않을 것은 자라지 않는다)
아무튼, 아픔 때문에 아픔을 들여다볼 시간이 생겼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혹은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아픈 시간들 때문에 분주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멈춰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아픔과 반려하는 나만의 자세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캘린더 일정에는 없는, 이름 없는 그 긴 시간들을 여기 이 작은 책에 기록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