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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01. 2021

『여름』(이디스 워튼)

『여름』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때에 쓰인 소설이다. 그렇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니다. 노스도머라는 가상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채리티라는 소녀가 생애 최초로 성적 열망과 사랑을 경험하며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성적 열망이라고 해서 에로틱한 것은 아니다.(에로틱한 장면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 단연 최고다.) 다만 이전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성에 대한 열망, 사랑을 나누면서 얻게 되는 정신적 만족감과 불안,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그로 인한 정신적 성숙을 다룬다.     




채리티는 노스도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서 태어난 아이다. 다섯 살쯤 되었을 때 로얄 변호사 부부가 노스도머의 ‘붉은 집’에 데려왔고, 채리티는 그 집에서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7년 후 로얄 부인이 죽고, 채리티는 로얄 변호사와 단둘이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채리티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로얄 변호사는 늦은 밤 불쑥 채리티의 방에 찾아오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채리티는 그에게 당당히 맞선다. 며칠 뒤 로얄 변호사는 채리티에게 청혼을 하고, 채리티는 그를 경멸하게 된다. 당장 집을 떠날 돈도, 어떠한 경제적 능력도 없던 채리티는 그 뒤로도 로얄 변호사 집에 머무르지만 그를 볼 때마다 혐오와 모멸감을 느낀다.


어느 여름날,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채리티 앞에 루시어스 하니라는 젊은이가 나타난다.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도시에서 왔으며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 뒤로 둘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몸과 마음을 주고받지만, 두 사람의 신분과 교육 수준 차이는 꽤 높은 벽이 된다.


로얄 변호사는 두 사람만의 비밀 공간(낡은 집)에 들이닥쳐, 루시아스 하니에게 왜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지 않냐며 하니를 몰아세운다. 로얄 씨가 돌아간 후, 하니는 채리티에게 일 때문에 얼마간 노스도머를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돌아오면 결혼을 하자고 한다. 하지만 채리티는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낀다.


하니가 떠난 후, 채리티는 그가 상류층 여인인 ‘볼치’와 약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자기 뱃속에 하니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무작정 집을 나선 채리티는 자신의 고향인 ‘산’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나 비인간적이어서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채리티를 데리러 온 이는 다름 아닌 로얄이었다. 로얄은 채리티를 마차에 태우고 다정하고 따스한 말투로 그녀를 배려한다. 로얄은 채리티를 보살펴주겠다고 하며 다시 한번 청혼을 하고, 채리티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를 따라나선다.


채리티는 하니에게 자신이 로얄 씨와 결혼했으며,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짧은 편지를 보낸다. 채리티는 로얄 씨에게서 일찍이 본 적 없던 사랑을 느끼며,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둘은 붉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자식처럼 보살피던 채리티에게 청혼을 하는 로얄 씨나, 그를 경멸하다가 끝내 안락하고 고요한 삶을 따라 그를 선택하는 채리티, 채리티에게 모든 사랑을 주는 듯했으나 뒤에서는 이미 같은 계층의 여인과 약혼한 상태였던 하니까지. 솔직히 단 한 사람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나의 윤리 기준과도 맞지 않고, 사랑의 가치와도 달랐다. 그래서 이 소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이 소설을 ‘성장 소설’이라고 할 때, 채리티가 하니를 만나 ‘사랑’을 하는 과정은 성장의 매개가 된다. 이전까지는 천방지축이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채리티’가, 사랑과 이별을 통해 조금은 차분해지며, 언제나 곁을 맴돌던 로얄 씨의 사랑과 헌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작품 전반에 어떻게든 ‘붉은 집’을 떠나고 싶어 하던 채리티가 마지막에 로얄 씨와 함께 ‘붉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집을 떠나고 싶고, 새로운 것을 열망하며, 전에 모르던 무언가에 빠져드는 것은 ‘소녀, 소년’의 특권이다. 그들에게 집이 주는 따스함, 안온함은 때론 속박이고 집착이다. 하지만 집을 떠나 시련을 겪은 이들에게 집은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안전하고, 편안하며, ‘나’를 그대로 품어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 과정을 ‘성숙’이라고 한다면, 떠남과 회귀의 과정은 그야말로 ‘성숙’의 과정일 것이다.      


채리티는 하니를 사랑하고, 그에게 성적 열망을 느끼는 동안 내내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유일하게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산’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도 없이 떠나버렸고, 남겨진 뱃속 아이와 함께 찾아간 ‘산’은 상상 그 이상으로 불행한 공간이었다. 결국 그녀는 붉은 집으로 돌아갔고, “너는 현명해”라고 말하는 로얄 씨에게 부끄러운 듯 “아저씨도 훌륭하세요.”라고 말했다.     


채리티는 분명히 성장했고, 성숙했다. 그러나 2021년을 살아가는 나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그녀의 성장과 성숙이 과연 ‘현명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뱃속에 이미 떠난 남자의 아이를 품고, 아버지처럼 자신을 길러준 이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 과연 ‘성숙’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이 쓰인 시대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독자인 나는 2021년을 살아가다 보니 소설의 결론이 어딘지 찜찜할 따름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 독자인 내가 얻은 것은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들이었다. 채리티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문장들도 인상 깊었다. 이디스 워튼도 자신의 소설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고 한다. “내면 풍경이나 작중 인물들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그려 본 적은 없다”며. 워튼의 표현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며, 누군가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단단해지는 한 소녀의 내면 심리가 굉장히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었다. 덕분에 읽는 내내 채리티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따라가며 읽을 수 있었다. 비록 그녀의 선택은 지금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6월의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봄처럼 투명한 하늘이 마을의 지붕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목초지와 낙엽송 숲에 은빛 햇살을 퍼부었다. 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갔다. 이 마을은 지대가 높고 탁 트인 곳에 자리 잡아 좀 더 아늑한 뉴잉글랜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리 연못 주변의 수양버들 덤불과 해처드 부인네 문 앞에 있는 노르웨이 전나무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길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7-8쪽)     

채리티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데다 감각이 무뎠는데, 그런 사실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며 공기, 향기, 색깔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몸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손바닥에 투박스럽게 느껴지는 산자락의 마른 풀이며 얼굴을 짓누르는 백리향 냄새, 머리카락과 면 블라우스 속을 스쳐 가는 바람, 솔송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21쪽)     

이런 오후에 채리티 로열은 햇빛이 비치는 계곡 위 언덕바지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드러누웠다. 그러면 풀밭의 따뜻한 기류가 몸속을 타고 흘렀다. 하늘을 향해 가냘픈 하얀 꽃과 청록색 잎사귀를 뻗은 블랙베리 가지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너머에 소귀나무 덤불이 구슬 같은 잔디의 새싹 사이로 꼬불꼬불한 줄기를 펴고 있었으며, 조그마한 노랑나비 한 마리가 한 점 햇살처럼 그 위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게 다였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도 그 주변에서 너도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산등성이에 옷을 입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나무 가지에서 옅은 초록색 솔방울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숲 아래쪽 돌 비탈에 소귀나무 잎사귀가 돋아나며, 저쪽 들판에서 단풍터리풀과 노랑꽃창포 싹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수액이 부글부글 끓고 잎집이 훌훌 옷을 벗고 꽃받침이 터질 듯 차오르는 모습이 온갖 향기에 실려 왔다. 나뭇잎이면 나뭇잎, 꽃봉오리면 꽃봉오리, 잎사귀면 잎사귀가 숨을 불어넣어 향기가 퍼 나가게 도왔다. 그중에서도 코를 찌르는 듯한 소나무 수액이 백리향의 짜릿한 향과 고사리의 희미한 향을 압도했으며, 이 모든 것이 햇볕을 받아 거대한 짐승의 숨결 같은 촉촉한 흙냄새와 하나로 어우러졌다. (53쪽)     

지난밤에 그녀에게 했던 부드러운 말을 후회하나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저려왔다. 그의 말은 연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오빠로서 건넨 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채리티는 애무하는 듯한 따뜻한 목소리에 그 정확한 의미를 놓쳐 버렸다. 오직 자신이 ‘산’에서 내려온 고아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자신을 꼭 안고 달콤하게 속삭이며 위로해 준 느낌이었다. 마을에 도착해 피곤하고 춥고 격해진 감정으로 아파하며 마차에서 내릴 때 채리티는 마치 땅이 햇살이 비치는 파도요, 자신은 물마루 위에 이는 물보라인 것처럼 느꼈더랬다.(90쪽)     

그녀의 새로운 자아가 신비롭게 펼쳐지는 것, 그녀의 오그라든 덩굴손이 빛을 향해 손을 뻗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채리티는 지금껏 감수성이 시들어 버린 듯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왔다. 처음에 하니의 애정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그 애정의 일부라고 할 언어였다.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165쪽)     

지금 채리티는 하니가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미지의 세계에서 다른 아가씨와 속삭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속삭임은 채리티의 입술에 그토록 자주 떠오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궂은 공모의 미소를 자아냈다. 지금 채리티가 사로잡힌 감정은 질투가 아니었다. 채리티는 그의 사랑을 확신했다. 오히려 그것은 미지에 대한 공포였고, 이 순간에도 그를 그녀로부터 멀어지게 해고 있음에 틀림없는 불가사의한 마력에 대한 공포였으며, 자신이 그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는 무력감에 대한 공포였다.(181쪽)     

이제 한 줄기 빛이 이 얼어붙은 세상을 가로질러 퍼져 나가고, 그 빛과 함께 그녀가 살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의 자리를 마련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두고 온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치명적인 무기력이 채리티를 짓눌렀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그곳에 계속 누워 있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이 비참한 무리 중 하나가 된다는 생각에 오싹함을 느꼈다. 그런 운명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길이라고 걷고, 삶이 부여할지 모르는 어떤 짐이라고 기꺼이 걸머질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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