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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03. 2021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자유란 무엇인가.     


너무나 쉽게 ‘자유’라는 말을 쓰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내 뜻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이가 자기 뜻대로 했을 때 생기는 문제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적절한 제약과 제한이 가해지는 선에서 개인의 뜻을 펼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적절한’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정해야 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미 한 세기 이전에 ‘자유’에 대해 깊이 고민한 사상가가 있었다.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주의 사상가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이름 뒤에 언제나 따라붙는 『자유론』이라는 책 때문에 막연히 그랬다. 그러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밀이 공리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리주의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자유’에 대해 궁금해하던 중에 독서모임을 통해 『자유론』을 만났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41쪽~42쪽)          


밀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것을 ‘자유’라고 정의한다.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여기서 ‘도움’을 ‘이익’으로 해석하면 밀의 공리주의자적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일을 스스로 선택해서 실천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개인이 가진 자유 의지의 표출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어나 좌절을 하더라도, 그건 개인의 몫이다.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거나, 그 길은 수많은 이들이 실패한 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선택을 말리거나 비난할 명분은 없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월권행위이다.



      

『자유론』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번역가와 출판사에 따라서 각 장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고, 한 장이 통째로 서술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머리말
제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
제3장 개별성(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
제4장 사회가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
제5장 현실 적용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법에 따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중략)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35쪽)        


밀은 머리말에서 자신이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밝힌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이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를 사회나 여론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 의지를 제재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밀의 『자유론』이 특별한 것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한다.     


왜 자유론이 단순하지 않은가? 그것은 밀이 자유 그 자체의 절대적 소중함을 역설하는 한편, 자유가 통제되어야 마땅할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란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개별성을 ‘거리낌 없이’ 발휘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자유인가? 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가치관과 감정, 그리고 나름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일정한 방향 아래 향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틀 속에서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262쪽, 『자유론』 해제-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고민한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이자, 사회는 개인이 살아가는 시공간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한다고 해서 사회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무작정 침범할 수도 없다. 그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 밀은 ‘진정한 자유’를 고민했다.      

               

『자유론』에서는 밀의 치열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밀은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며, 개인의 ‘개별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라 이름 붙은 것들에 대해서도 계속 의문을 갖고, 소수의 발언을 의미 있게 들으며, 내 생각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모두의 생김새가 다르듯 각자가 가진 개성은 천차만별이니, 저마다의 개성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누구나 동의할 만한 말이지만, 실천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나와 다른 남을 보며 ‘저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저 사람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어’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가 훨씬 더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나의 의견을 세워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가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보다 ‘틀림’을 해석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우리이기 때문이다.      


『자유론』이 세상에 나온 것이 1859년이라고 하니, 그 후로 벌써 165년이 흘렀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밀이 주창하는 ‘자유’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어찌 된 노릇인지,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유 의지를 발휘하는 개인보다 특정 집단에 편승하려는 개인이 더 많아 보인다.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극도로 꺼리면서, 타인의 자유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기심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론』에 대한 여러 비판은 덮어두고, 의미 있는 부분들만으로 상상해본다. 밀이 그리던 ‘진정한 자유’가 존재하는 세상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자유 의지를 마음껏 펼치는 세상.

그러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 영역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는 세상.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상황은 건강한 토론으로 해결해 나아갈 수 있는 세상.

‘비난’보다는 ‘비판’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이 행복한 세상.                         




여론을 빌려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50쪽)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사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의견이 상이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57쪽)          

오늘날 우리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못되게 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약하다. (중략) 우리의 사회적 불관용은 사람을 죽이거나 어떤 생각을 뿌리째 잘라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관용 앞에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게 된다. 또는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된다. (78쪽)

심각한 문제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의문이 줄어든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가 확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잘못된 의견이 그렇게 확고해지면 위험하고 나쁜 영향을 주겠지만, 참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 의견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한 동시에 필수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현상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어떤 한 진리를 더 생생하고 깊이 이해하게 된다. (99쪽)     

만일 사람이 세상 또는 주변 환경이 정해주는 대로 살아간다면, 원숭이의 흉내 내는 능력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선택하는 사람만이 자기가 타고난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관찰하기 위해 눈을 써야 하고,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 이성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자료를 모아야 하며,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이런저런 차이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결정하고 나면, 자신의 신중한 선택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확고한 의지와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사람이 모두 갖추어야 하고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각자 행동을 스스로의 판단과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것과 정확히 비례해서 커진다. 물론 이런 것이 없어도 위험을 피해 좋은 길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어느 경우에 인간으로서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까? 인간이 무엇을 하는지뿐만 아니라,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삶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 그 자체이다. (129쪽)

인간은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을 획일적으로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중략)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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