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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l 09. 2021

『당신이 옳다』(정혜신)

제목에 끌려 구입한 후 베스트셀러인 줄도 모르고 책장 한 편에 꽂아놓았던 책이었다. 북두칠성 독서모임의 선정도서가 되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미루어두었을 책이었다. 읽는 동안 꽤 자주 책장을 넘기지 못한 채 눈과 마음을 멈추었다. 한 호흡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페이지를 넘기기도 했다. 때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덕분에 생각지 못한 치유를 경험했다.      




스스로를 공감 능력이 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텔레비전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주인공보다 더욱 오열했고, 개인적으로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들이 겪는 불행도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중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아이가 있으면 유난스러울 정도로 마음을 쏟았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에서 기쁨을 느꼈고, 나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이가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지을 때면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신이 옳다』를 읽으며 깨달았다. 이제껏 내가 해온 것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170쪽)     

공감을 주고받는 일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너’인지 경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너를 공감해야 할 순간인지 내가 먼저 공감을 받아야 하는 건지 알아야 너와 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감을 할 수 있다.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공감에 대한 정확성이 높아진다. (181쪽)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에게도 무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타인을 도울 자격이 없는 사람의 비겁한 행위도 아니다.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도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193쪽)     

공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자기 보호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194쪽)     


나에게 아픔을 내어놓는 이들을 만날 때면 ‘나’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나’와 ‘너’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고, 오직 ‘너’만 남겼다. 자주 나를 보호하지 못했고, ‘너’만을 보호했다. 그것이 아픈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고, 공감의 기본이라 여겼다. 상대의 아픔을 마주하다 내 아픔이 자극되는 순간에도 모른 척 눈을 감기 일쑤였다.      


‘지금 당장 힘든 건 내가 아니니까.’

‘지금은 네가 너무 아프니까.’     


나의 마음에는 무심하면서 ‘너’의 마음에는 민감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는 일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매번 상처 받으면서도 어떻게 전혀 몰랐는지. 관계 속에서 시들어가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토록 무심했던지.     


다른 사람을 공감하기에 앞서 나 자신부터 보호해야 했다. 내 마음에 공감해야 했다.




엄마가 되면서 더 자주 ‘공감’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에도 머리를 움직여 ‘공감’하려 애썼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자라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공감’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은 자주 버거웠다. 아이들은 자기감정에 솔직했지만 표현에는 서툴렀다. 서투른 표현 속에 숨은 진짜 마음을 찾아내고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되돌려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하다 생각했으니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은 헐어갔다. 누구도 내 마음의 안부를 물어주는 이는 없었다. 나 스스로도 내 마음은 살필 줄 몰랐다. 지금은 ‘엄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니 내 마음은 잠시 접어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에는 휴지기가 없었다. 끊임없이 물어야 했고 살펴야 했으며 끌어안아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때마다 몸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듯, 마음에 필요한 표현을 해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당신이 옳다』에서 가장 자주 나온 표현, ‘마음은 언제나 옳다’를 만날 때마다 위로가 되었다. 내 삶과 전혀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를 읽다가도, ‘당신이 옳다’는 문장을 만나면 마음이 저릿했다. 때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마음에 안부를 물었다. ‘누가 물어주지 않으면 어때, 내가 물어주면 되지. 내 마음 내가 돌보아주면 되지.’ 생각하면서.      




숨 쉬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 삶의 속살을 바탕으로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중략) 나와 내 옆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을 나는 ‘적정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25쪽)     


저자의 소망은 적어도 나 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이루어졌다. 책을 읽으며 ‘나’의 마음을 바라보게 되었고, 내 옆 사람의 마음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방법을 배웠다. 앞으로 어떤 엄마가 또 아내가 되어야 할지 꽤 선명해졌다. ‘도움이 되는 도움’을 확실히 받았다.      


가끔, 한 권의 책이 인생의 궤도를 비트는 경험을 선사하는데, 『당신이 옳다』가 그랬다. 책장 한 편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이 책을 더 늦기 전에 만나서 너무나 다행이다.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이제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싶을 때면, 무조건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상대의 마음에 충조평판 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향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겠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169쪽)’이라는 저자의 표현을 빌려, 공감의 바람이 불러올 새로운 봄을 기대해본다.




* 마음에 남기고 싶은 문장                     

거의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을 뇌에서 찾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공 모양의 물통처럼 소박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지닌 심리적 힘을 말하고자 한다. 그 힘은 즉시 작동한다. 약물치료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삶의 고통에 실질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적인 힘이다. 그 힘의 중심이 공감이다. (27쪽)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은 옳다’는 확인이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져 간다.(48쪽)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49쪽)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다. 병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말이다. (86쪽)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이해관계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물론 가족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93쪽)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105쪽)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사실 지금 그의 상태를 내가 잘 모르지 않는가.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 거니?”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107쪽)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110쪽)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120쪽)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125쪽)     

공감은 좋은 말 대잔치나 칭찬의 립서비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늘 옳은 말 같은 비판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공감은 상대에게 전하는 말의 내용 자체가 따뜻한가 아닌가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말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말이 어디에 내려앉은 말인지가 더 중요하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향하고, 존재 자체에 내려앉는 말이 공감이다. (140쪽)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품고 공감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 모든 것이란 상대방 존재 자체와 그 존재의 마음이다.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감한다는 것은 그의 분노, 분노를 유발한 상황과 그 상황에 처한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뜻이지, 폭력적 행동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196쪽)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옳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감정을 긍정적, 부정적으로 가르는 시각은 한 존재의 핵심에 다가가는 일, 누군가에게 깊이 공감하는 일을 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221쪽)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266쪽)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297쪽)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게 끝이 아니구나.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는 거구나.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구나.”하는 것을 몸으로 익힌다. 그 힘으로 삶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이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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