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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에 당첨되어도 회사는 잘 다닐 거지?』 (신재호)

by 진아

그동안 에세이를 잘 읽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는 별로 얻을 것이 없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이왕 읽는다면 각 분야의 전문가가 쓴 전문서적을 읽고 싶었다. 일기장과 경계가 모호한 에세이를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다.


‘브런치’라는 공간을 접하면서 에세이에 속하는 글들을 무척 많이 읽었다. 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동안 에세이를 ‘하대(?)’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기처럼 보이는 글에도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지 써본 후에야 알았다. 나의 글을 읽어주는 분들과 소통하며 지극히 개인적이라 생각하며 썼던 글이 공감과 위로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로써 글을 읽고 책을 읽는 이유는 머릿속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마음속 빈자리를 어루만지기 위해서이기도 함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로또에 당첨되어도 회사는 잘 다닐 거지?’는 마음속 빈자리를 공감과 위로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한 에세이였다.



‘대한민국에서 아들, 남편, 아빠 세 가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저자의 이력이 묘하게 낯설었다. 아들, 남편, 아빠.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다. 딸이자 아내, 엄마로 살아온 나로서는 저자의 삶이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비슷한 세계 속에 사는 이에게 애정이 생기는 만큼, 저 먼 세계에 사는 존재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40대 아들, 남편, 아빠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책은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77년생 신재호 이야기, 아빠 신팔불출 이야기, 남편 삼식이 이야기, 아들 신장남 이야기, 직장인 신계장 이야기, 작가 실배의 이야기까지. 77년생, 아빠, 남편, 아들, 직장인, 작가, 여섯 개의 부캐는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저자의 삶을 이끌고 있었다.


‘불혹’일 줄 알았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77년생 40대로, 아이들의 애정표현 앞에서는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신팔불출로,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삼식이 남편으로, 일과 사람에 치이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신계장으로, 갑자기 찾아온 공허함을 읽고 쓰는 일로 이겨낸 작가 실배로, 저자는 때마다 적절한 부캐로 분해가며 쉽지만은 않은 삶을 유머러스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낯설게 느껴졌던 아들, 남편, 아빠라는 역할은 내가 살아내고 있는 ‘딸, 아내, 엄마’라는 역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또만 되면 꿈을 찾아 떠나야지’ 단꿈을 꾸면서도 현실에 디딘 발에 힘을 풀지 않는 것은 아들이자 남편,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로또만 되면 당장 떠나지!’ 물론, 로또가 안 되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겠지만.


나인들 왜 안 그럴까. 로또를 사본 적도 없으면서, 삶이 팍팍할 때마다 생각했다. 로또만 되면! 그 비현실적인 가정에 기대어 꿈보다 더 꿈같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잠깐의 위로가 되었다. 멀게만 느껴지던 저자의 삶이 내 삶에 고스란히 포개어지는 듯했다.


2년 후면 40대가 된다. 40대면 모든 것이 안정될 줄 알았지만 지금 흘러가는 대로라면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아이들은 자랄수록 예상할 수 없는 숙제를 안겨줄 것이고 남편과의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오갈 게 뻔하다.(그나마 냉탕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딸로서의 역할은 많이 밀려났을 테지만 장녀라는 타이틀은 여전히 책임과 한 세트가 되어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게 할 것이다. 직장에서는 10년 차가 훌쩍 넘었을 테지만 오랜 육아휴직으로 일은 버벅댈 것이고, 가정과 직장에서 적절한 무게 중심을 잡느라 언제나 위태로운 시소 타기를 할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머지않은 미래의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읽기 전 ‘너무도 다른 세계(아들, 남편, 아빠)에 살고 있는 저자의 일상에서 공감할 부분이 얼마나 있을까’ 잠시 망설였던 것은 기우였다. 맛깔난 문장과 유머 넘치는 표현 덕분에 자주 키득거렸다. (실로 이렇게 깔깔거리며 읽은 책도 참 오랜만이었다.) 저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면 때론 가슴 한 편이 저릿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읽는 내내 공감하고 공감받으며 위안과 위로를 얻었다.




‘과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40대 아들, 남편, 아빠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읽었다. 답은 단순하지만 명쾌했다.


그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하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가 진정한 ‘나’가 아니었을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그간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며 낑낑댔다. 수줍고 부끄러운 모습이 싫어 꽁꽁 감추며 밝은 척, 사교적인 척하며 살았다. 그 짐을 벗어던지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지인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고 남은 시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글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굳이 애쓰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삶을 이제야 만났다. 이 길이 내 길이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갈 생각이다. (28쪽)

시간이 흐를수록 운신의 폭이 점점 더 줄어든다. 사십 대 가장이 갖는 부담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저 돈 버는 기계로서 인생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걸까.
잠시나마 가장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라도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위안을 품고 살지 않는가. 지금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쯤 어디이지 않을까. (35쪽)

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족보도 없는 급조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딸이 원한다면야 무엇을 못하랴. 오늘 유혹의 기술이 제대로 먹혔다. 우리에겐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웃음 빵빵 터지는 이야기 말이다.(69쪽)

요즘 딸아이는 싱그러운 봄 그 자체다. 눈은 바다가 햇살을 맞은 것처럼 반짝거리고, 뺨은 첫사랑을 만난 듯 발그레하다. 첫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빠로서 축복해 주어야 마땅하나,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그 콘서트가 바로 딸과 나의 듀엣 콘서트이기 때문이다.(86쪽)

이 사람과 함께여서 늙어간다는 것이 그리 슬프지 않다.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도 이렇게 투닥거리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낼 것이다. 나도 그때쯤에는 아내에게 듬직한 오빠가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 꿈나라로 향한다.(130쪽)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삶이 너무 지쳐 힘든데 어디 말하기는 그런. 그럴 땐 어머니의 손맛이 떠오른다. 소박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듬뿍 담긴 집밥이.(162쪽)

그래 맞다. 그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면 행복하거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부러움이 눈을 가렸다. ‘마흔쯤 되면 이 정도는 살아야지’하는 도식을 만들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용납할 수 없었다. 마흔에 골프를 못 쳐도 실패가 아니라 골프 없는 삶일 뿐이다. 마흔쯤 되었으니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208쪽)

삶을 기록하면서부터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지금까진 직장에서의 성공과 좋은 남편, 아빠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나’에게 초점을 맞춰보니 조금은 세상을 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과정이었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오롯이 나에게 초점을 맞추니 허무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이 시기가 그렇구나… 늦게나마 찾아서 정말 다행이었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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