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가 진정한 ‘나’가 아니었을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그간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며 낑낑댔다. 수줍고 부끄러운 모습이 싫어 꽁꽁 감추며 밝은 척, 사교적인 척하며 살았다. 그 짐을 벗어던지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지인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고 남은 시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글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굳이 애쓰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삶을 이제야 만났다. 이 길이 내 길이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갈 생각이다. (28쪽)
시간이 흐를수록 운신의 폭이 점점 더 줄어든다. 사십 대 가장이 갖는 부담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저 돈 버는 기계로서 인생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걸까.
잠시나마 가장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라도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위안을 품고 살지 않는가. 지금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쯤 어디이지 않을까. (35쪽)
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족보도 없는 급조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딸이 원한다면야 무엇을 못하랴. 오늘 유혹의 기술이 제대로 먹혔다. 우리에겐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웃음 빵빵 터지는 이야기 말이다.(69쪽)
요즘 딸아이는 싱그러운 봄 그 자체다. 눈은 바다가 햇살을 맞은 것처럼 반짝거리고, 뺨은 첫사랑을 만난 듯 발그레하다. 첫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빠로서 축복해 주어야 마땅하나,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그 콘서트가 바로 딸과 나의 듀엣 콘서트이기 때문이다.(86쪽)
이 사람과 함께여서 늙어간다는 것이 그리 슬프지 않다.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도 이렇게 투닥거리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낼 것이다. 나도 그때쯤에는 아내에게 듬직한 오빠가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 꿈나라로 향한다.(130쪽)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삶이 너무 지쳐 힘든데 어디 말하기는 그런. 그럴 땐 어머니의 손맛이 떠오른다. 소박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듬뿍 담긴 집밥이.(162쪽)
그래 맞다. 그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면 행복하거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부러움이 눈을 가렸다. ‘마흔쯤 되면 이 정도는 살아야지’하는 도식을 만들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용납할 수 없었다. 마흔에 골프를 못 쳐도 실패가 아니라 골프 없는 삶일 뿐이다. 마흔쯤 되었으니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208쪽)
삶을 기록하면서부터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지금까진 직장에서의 성공과 좋은 남편, 아빠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나’에게 초점을 맞춰보니 조금은 세상을 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과정이었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오롯이 나에게 초점을 맞추니 허무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이 시기가 그렇구나… 늦게나마 찾아서 정말 다행이었다.(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