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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퀴어 이반지하』(이반지하)

by 진아
이반지하가 추천하는 이반지하.


다른 추천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한 줄이면 충분했다. 이반지하는 이반지하를 추천했다. 어제 인쇄소로 첫 책의 인쇄를 넘긴, 생초보 작가인 나에게 이 한 줄은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내가 ‘나’를 추천할 수 있는 담대함. 내가 이반지하에게 느낀 첫 느낌은 담대함, 아니 어쩌면 대담함이었다.

제목대로, 이반지하는 퀴어다. 나는 퀴어에 대해 잘 모른다. ‘이웃집’ 퀴어라는 제목이 낯설 만큼, 내 주변에는 퀴어가 없다.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게 될까,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태로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은 나의 지레짐작을 마음껏 비웃고 있었다. ‘그래, 겨우 네 생각이 그 정도지.’ 하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제목에 대놓고 퀴어라는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해서,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서술하리라 생각했다니. 정말 가소롭군.’ 하며 웃어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이야기였다.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헤테로(이 말이 이성애자를 뜻한다는 말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이지만, 책의 어느 부분에서는 마치 내가 이반지하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성별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약자로서의 포지션을 취하게 되는데(밤길을 두려워해야 하거나, 혼자 다니는 것에 심리적 제약을 받는 것 등), 이반지하는 눈앞에서 부모가 서로에게 죽음을 겨누는 광경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퀴어라 명명되는 성소수자였고, 생계형 프리랜서(어쩌면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스스로를 정신병자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났다면 이반지하가 아니지. 나는 저자가 삶을 살아내는 태도가 무척 인상 깊었다. 현대미술가로, 애니매이션 감독으로, 퍼포머로, 작가로, 각본가로, 그리고 유머리스트로 본인의 자아를 마음껏 확장하며 세상과 만나는 이반지하를 보며 때론 통쾌했고 때론 숙연했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이반지하의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그 세계에서 이반지하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지닌, 아티스트였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이반지하의 삶을 다 알 수 없다. 극히 일부만을 겨우 엿본 것일 테다. 그 일부만으로도 자주 온몸이 찌릿거릴 만큼의 큰 자극을 받았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이반지하의 삶을 모를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나에게 이반지하의 삶은 영원히 낯설고도 먼 세계일지도.(이 책을 읽고 나니, 여기서 ‘평범’하다는 말을 쓰는 것조차 어딘지 낯 뜨겁다.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해놓은 것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반지하를 만났고, 적어도 만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전부는 아니며, 이 방식만이 ‘옳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는 나와 다르며 다름이 틀림은 아니라는, 그 진부한 명제가 이렇게 강렬하게 와닿기는 처음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나는 또 이반지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왠지 그럴 것만 같다. 그때는 내가 이반지하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공연할 때마다 나는 관객이 모두 퀴어라고 상정하고 퍼포먼스를 한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는 성정체성에 관한 여러 가지 구분과 분류가 있고, 그것이 인권운동적인 측면에서나 사회 담론의 측면에서는 엄청나게 유효할 수 있지만, '사람 간의 개별적 관계'의 맥락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게 그렇게 확고한 경계를 지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개개인의 개별성과 저마다의 다양한 관계 맺음을 훨씬 더 피부에 와닿게 경험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퀴어와 헤테로를 대립 구도로 보지 않는다. 그냥 우리는 다 '퀴어'라고, 실상은 헤테로가 퀴어의 하위 범주라고 인지한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으로 이상한 변태들일 뿐이고, 그것은 헤테로 역시 마찬가지다.(53쪽, 정상이라 미안한 친구들에게)

저는 지금 이 사회에서는 패배주의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 이상한 것 같아요. 경쟁에서 뽑히는 사람이 적을수록 떨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거잖아요. 뭐, 그렇게 대단해서 패배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거절이란 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이유로 행해지는 게 아니라 되게 흔하고 평범한 경험이니, 그걸 너무 한계라고 견고하게 느끼지 않길 바라요. 그리고 그 거절과 패배를 겪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결정타가 될지 모른다는 거?(99쪽, <월간 이반지하> 10호)

물론 세상 당신, 당신도 나를 견디고 있다. 세상 역시 거대한 젠더 추격전이라는 세계관의 무대인 동시에 집단적 관념의 뭉치로서 젠더 역할을 맡아, 나와 나의 젠더를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아, 너는 나와의 관계에서 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을 부디 쪼끔은 인정하길 바란다. (180쪽, 젠더 쫓김이)

무기력감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죽고 싶고, 부모한테도 미안하고……. 그런데 무기력감은 미안한 게 아닙니다. 내가 무기력해서 뭐가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뭔가가 힘들기 때문에 무기력감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기력감은 어떻게 보면 골절 같은 거죠. 난 지금 조금 다친 상태인 거예요.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나를 돌보는 걸 우선순위에 두어야지. 나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난 무기력해서 문제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211쪽, <월간 이반지하> 8호)

처음엔 기가 막히지만, 너무나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다 깨부수면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삶에서 나는 그냥 '보는 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는 애초에 그 생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그저 보는 것 정도나 겨우 껴들 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예고도 빚지지 않은 채, 어떤 껄끄러움도 없이 순정하게 지 할 일만 하고 사는 거다. (336쪽, 짐승 같은 식물적인)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한 사람의 창작 과정이나 삶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판단할 순 없어요.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 해도 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그게 이 사회가 우리에게 안 주는 메시지인 거 같거든요.(343쪽, <월간 이반 지하> 2호)

당신의 삶은 나와 얼마나 같고 다를 것인가. 어찌 됐든 부디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상에 감사하며 범사에 범사하길 바란다. 근데 사실은 안 바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기 바쁘다. 당신도 바쁠 것 같다. 그러니까 가끔만 만나자. 다음에 또 만나자.(359쪽,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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