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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릭 와이너)

by 진아
삶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죽고 싶지 않은 자의 절박함이다. 특정 위기를 꼽을 순 없다. 건강에 대한 불안도 없고, 경제적으로 천벌을 받지도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올 법한 위기가 있다기보다는, 짜증과 실망이 은은하게 흐르고 내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내게 아직 삶은 골칫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턱밑에서 시간이 내뱉는 뜨거운 숨이 느껴진다. 매일 조금 더 강하게,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 한다. 그것도 너무 늦기 전에.(15쪽, 들어가는 말)


살면서 위기 한 번 겪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삶은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평범’이라는 말이 그토록 ‘평범’하게 쓰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수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산다. 그 삶이 잘못되었다는 의심조차 하지 못한 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통해, 저자와 함께 철학으로 기차여행을 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다수의 사람에 속한 나 또한 내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의심하지 못했고,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구분할 여유조차 없이 살고 있었다.


이번 철학 기차여행을 통해,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삶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를.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가장 큰 매력을 꼽자면, 유머러스함이다. 철학책을 읽으며 키득거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철학이라는 표제어 자체가 갖는 무게도 어마어마하지만, 소크라테스, 루소, 간디, 공자, 니체 …… 이름만 들어도 뒤돌아서고 싶은 철학자가 무려 14명이나 등장하는 책에서 감히 웃을 수 있다니! 저자의 필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철학자들의 궤적을 좇으며 그들의 철학을 ‘경험’하는 방식이 신선하기도 했다. 중간중간에 십 대 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딸(소냐)의 말이 웬만한 철학자의 말을 능가하는 것이라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는 즐거움도 컸다.


- 목차 -

1부 새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루소처럼 걷는 법
소로처럼 보는 법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2부 정오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간디처럼 싸우는 법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3부 황혼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몽테뉴처럼 죽는 법


저자는 철학을 삶으로 끌고 온다. 전혀 괴리감이 없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떠올리고, 산책하며 루소를 만난다. 아끼던 공책을 잃어버린 뒤 시몬 베유를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싼 젊은 사람들을 보며 자신은 늙지 않았다고 외치다가 보부아르의 문장을 상기한다. 누구나 겪을 만한 삶의 한 장면에, 아주 자연스럽게 철학을 끌어들인다. 철학은 삶을 물들이고, 삶은 전보다 조금은 나은 모습으로 보인다.


저자가 만난 14명의 철학자들은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들의 저서를 모두 읽어보고 싶을 만큼. 그중에서는 소크라테스나 소로, 간디, 공자, 니체처럼 적어도 이름은 익숙한 이들도 있었지만, 세이 쇼나곤이다 에픽테토스처럼 (적어도 나에게는) 낯선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삶’을 고민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철학으로 세운 이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고, 우리 모두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겠지만,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니까.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니까.


‘나’를 지키고, ‘나’를 일으키며, ‘나’로 살다가, ‘나’로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특히 내가 ‘조금만 더-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취약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예를 들면 돈과 명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마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에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212쪽,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슬픔은 무척 무겁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그건 환상이다. 어쩌면 슬픔은 우리 생각보다 가벼울 수 있다. 어쩌면 꼭 용감무쌍한 행동이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삶에서 흔히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작은 것들의 위대한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할 수도 있다. 어쩌면 구원은 보기보다 가까울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저 손을 뻗어서 문을 닫는 것뿐이다. (352쪽,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동한다. 스토아 철학은 헷갈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425쪽,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나는 이것이 노년의 최종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물길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 카이로스의 지혜.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심지어 물러나는 것에도.(474쪽,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다. 우리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치는 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죽음의 희생자가 아니다. (493쪽, 몽테뉴처럼 죽는 법)

하지만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505쪽,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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