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장명숙)

by 진아

할머니라는 단어와 밀라논나라는 단어 사이에서 묘한 불협화음이 느껴졌다. 할머니라는 단어가 지닌 특유의 정스러움과 밀라논나라는 단어가 지닌 세련됨 사이의 괴리라고 해야 할까.

밀라논나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패션계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저자 장명숙 님은 일흔을 눈앞에 둔 할머니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평범한 노년은 확실히 아니었다.

여전히 매일이 설레고 (유퀴즈에서 그녀가 every day is a new day!라고 외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매사가 재밌는 그녀에게 노년이라는 말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았다. 현역에서는 물러났지만 매일 의 루틴을 꼬박꼬박 지키는 모습부터, 욕심이 들어설 자리에 나눔을 채워가는 모습까지. 그녀의 삶은 여전히 생기가 넘쳤고 열정으로 충만했다.



자존. 하나뿐인 나에게 예의를 갖출 것
충실. 24시간을 알뜰히 살아볼 것
품위. 조금씩 비울수록 편안해지는 것
책임. 이해하고 안아주는 사람이 되어볼 것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분의 내용이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자존, 충실, 품위, 책임. 이 네 가치는 저자의 삶 곳곳에서 만나고 결합하며 저자의 삶을 빛나게 해 주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며, 매일 매 순간을 알뜰히 사는 것, 내 그릇을 비우고 어려운 이의 그릇을 채우며, 나 외의 남을 돌아보고 그들을 온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

어쩌면 너무 뻔한 '좋은 삶'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문장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가슴에 가닿은 것은 저자의 삶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저자의 삶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었고, 그것을 꾸밈없이 담아낸 책이니 좋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곳곳에 좋은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문장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딱 하나를 꼽자면 '자존' 부분에서 만난 이 문장이다.


나의 가치비용을 조금 할인하는 것.
나를 조금 할인해서 팔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
그러면 늘 내가 우위에 서 있지는 못해도 동등한 위치에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48쪽)


이제껏 '자신의 가치비용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의 가치비용을 높여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지만, '나의 가치비용을 조금 할인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나의 가치비용을 할인하라니?', '할인하려는 상대와 투쟁을 해서라도 내 가치비용을 높여야 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이 아니었던가?' 스스로에게 끝없이 질문하게 되는 문장이었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서 선명해지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주체'이었다. 결국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의 가치비용을 스스로 책정하라는 것이었다. 나의 가치비용을 상대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역량 대비 가치 비용을 조금 할인해보라는 것. 그리고 보란 듯이 내 역량을 펼치고, 종국에는 그 관계의 주도권을 내가 쥐라는 것.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비난 앞에서도 저자는 당당했다. "내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만큼 받으면서 동시에 내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자신의 가치 비용은 조금 할인해주세요. 조금 더 받아서 내 자유를 빼앗기지는 마세요. 훗날 직장을 떠날 때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특혜는 더더욱 받지 마세요.(49쪽)"라고 답하며.


나의 가치를 스스로 제안하고, 최선을 다해 일한 뒤,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 그녀의 노년이 왜 후회보다 설렘으로 가득한지 알 수 있었다. 못 견디게 그녀가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노년이 되기 전에 이 책을 만나서, 이 문장을 만나서. 나에게는 앞으로의 시간이 남아있고,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말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 책을 만나서인지, 더 애틋하다. 올 한 해,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주어진 24시간을 얼마나 충실히 살았는지, 가진 것을 얼마나 비워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안아주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더불어, 아직은 어렴풋한 생의 끝자락을 떠올려보며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가늠해본다.

조금 더 좋은 삶을 살고 싶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



자신을 들볶지 말고 내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라고. 그러려면 자신의 어깨에 걸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요구부터 먼저 알아차려서 들어주어야 한다고.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아야 타인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자신의 몫이라고.(21쪽)

기성세대는 인생을 숙제 풀듯 살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축제처럼 살게 해 줍시다. 경계선을 잘 파악하시고 선을 넘지 않을 때 어른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어른이 되는 건 정말 힘든 거래요.(71쪽)

내가 좋아하는 고 피천득 시인은 <인연>이라는 책에서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간다'고 말했다. 나는 위대하진 않지만 내 시간의 주인은 바로 나여야 한다.(103쪽)

심신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때가 바로 노년이다. 원한다면, 가만히 앉아 하루 종일 햇살도 볼 수 있으니 눈이 부시지 않은가.(153쪽)

자기 삶의 단독자로 서서 당당하게 사는 여성들이 많아졌다.(210쪽)

그렇게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충만한 기쁨이 되기를.(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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