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태지원)

by 진아

언젠가 그림 앞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나를 울게 했던 그림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었다. <작은 사슴>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는데, 여기저기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는, 칼로의 얼굴을 한 사슴의 모습을 보고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당시 나는 교직 2년 차였다. 교사가 되었다는 기쁨은 금세 잊혔고, 눈앞의 현실만이 어깨를 짓누르던 때. 그때 맡았던 중1 아이들은 선배 교사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말썽쟁이들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누가 누구를 놀리는 귀여운 장난을 넘어서,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열릴 만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온 아이들, 술을 마시다가 주민의 신고를 받은 아이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대들어 불려 온 아이들, 수업 중에 소란을 일으켜 벌을 받고 있던 아이들……. 처음에는 신규교사의 열정으로 하나하나 끌어안아 보았지만, 서른 명이 정원이었던 반에서 절반 이상이 그런 사건 사고에 휘말리는 아이들이다 보니 자꾸만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더라도 쉴 수가 없었다. 미처 다 마치지 못해 싸들고 간 각종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발을 담가 둔 여러 모임에도 나가야 했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애도 지속해야 했다. 몸은 미치도록 바쁜데 마음은 자꾸 공허하고, 어디에 털어놓자니 배부른 고민 같았다. 남자친구에게도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고, 여전히 임용 시험을 준비 중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료 교사들에게도 뭐든 척척 잘 해내는 교사로 보이고 싶었고, 아이들에게도 신뢰받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런 때에 프리다 칼로의 <작은 사슴>을 만난 것이다. 꼭 그 사슴이 나 같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림을 보고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후로, 그림은 내게 ‘위로’의 상징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림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이 가득 실린 책을 보는 것이 좋았다. 자주 보는 그림의 제목도, 화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해서 ‘아, 이 그림 어디서 봤는데, 이 화가 이름 들어봤는데’ 하면서도, 그냥 멍하게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을 즐겼다. 어떤 때는 울고, 어떤 때는 웃고, 어떤 때는 감격하고, 어떤 때는 아무 생각 없이도.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은 딱 내 마음 같은 책이었다. 평소에 책을 좀 빨리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아주 오랜만에 천천히, 꼭꼭 씹어 읽은 책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후루룩 마시듯 읽기에는 문장 문장이 너무 내 마음 같았다고 해야 할까. ‘맞아, 그렇지. 그랬지. 그럼, 그렇고 말고.’ 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어쩌다 한 번씩은 멍하니 책의 한 페이지를 붙잡고 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누구에게 일일이 말하기도 어려운 마음을 알아차려 주는 그림 한 점,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일상을 차분히 바라보게 해주는 그림 한 점, 아프고 쓰린 상처를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그림 한 점,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그림 한 점……. 읽어가는 동안 책의 제목대로 ‘위로’ 받았고, ‘위안’ 삼았다.


작가님은 고흐의 낡은 구두 연작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는 용기’를 얻고, 안니발레 카라치의 ‘콩 먹는 사람’에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를 위한 어떤 구체적 ‘행위’를 찾아야 함을 깨닫고, 앙리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는 순간 삶의 원초적 기쁨을 생각하겠노라 다짐한다. 고흐와 고갱의 그림을 보며 관계의 유통기한을 되새기고,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에서 부적응의 세계를 건너가는 법을 배운다.

수많은 그림과 그 속에 담긴 화가들의 삶을 통해 전해지는 위로는 잔잔했지만, 위로의 파도는 꽤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을 새롭게 보게 하고, 관계를 되새기게 하며, 삶을 다시 살게 했다. 작가님의 진심이 담뿍 담긴 글을 읽으며, 마치 그 위로의 파도가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쉽게 읽히지만, 금세 읽고 책장에 꽂아 둘 책은 아니다. 삶에 흔들릴 때, 관계에 휘청거릴 때, 나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때마다 꺼내어 작가님의 밤에 함께 앉고 싶다. 그림 한 점을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그녀를 떠올리며, 위로받고 위안 삼으며 다시 일어설 혹은 완벽히 주저앉아 엉엉 울 용기를 얻고 싶다.

고마운 책을 만나서,

참 고마운 날이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을 도울 수 있다.(58쪽, 뭣이 중헌지 묻는다면)

욕망이나 자괴감이 과도해 힘들어질 때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다시 본다. 내 삶의 원초적 기쁨에 대해 생각해본다. 남들과 상관없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골똘히 고민해본다. 그러면 내 마음속 경쟁 레이스가 일시에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불행하지 않게 지내는 비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73쪽, SNS 속 타인의 그럴듯한 삶이 부러워질 때)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에 유통기한이 있듯 이 관계도 유통기한이 다 되었구나. 이제 놓아두어야겠다.’
이제는 안다. 관계의 유통기한이 끝났을 때는 손에 쥐고 있던 힘을 푸는 편이 낫다는 것을. 맞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다. (101쪽,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라 해도, 당신에게 함부로 상처 줄 권리를 가지지는 못한다. 가까운 이가 나에게 “너는 이른 사람이야. 너의 한계는 여기야.”라고 말한다면 마음속으로 로도 이렇게 맞받아치자.
“나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삑! 그건 당신의 착각입니다.”(151쪽, 인간관계를 망치는 최악의 착각

당신을 위로해줄 만한 사람도, 글도 음악도 없다면 스스로에게 기꺼이 위로받아야 한다. “너 많이 외롭고 슬펐구나”, “상처 입었구나. 그럴 만해.”라고 자신에게 말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외로움과 고통, 불안에 지배당하는 날을 누구나 겪는다. 스스로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 순간 외롭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스스로를 허약한 사람이라 탓할 필요는 없다. 외롭고 슬프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날도 존재함을 인정하자. 타인에게 기댈 줄 아는 것도 일종의 용기다. (203쪽, 위로받고 싶어 카톡 친구 목록을 뒤적이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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