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어찌 보면 철학적이었지만, 어찌 보면 단순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만 사는 동안 잃어버린 나(자아)를 찾기 위해서였고 그 수단이 글쓰기였던 이유는 접근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선량 작가님의 글에도 언급되었듯이, 글쓰기에는 별다른 수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몸과 거의 혼연일체인 휴대전화의 메모장을 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글을 쓰는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이들도 많았다. 책을 낸 이후에는 그 치켜세움이 민망할 정도로 커졌다. 이쯤 되니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왜 하필 글쓰기이었을까?
나에게는 나를 들여다보고 표현할 수단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는 운동으로 가꾸어진 몸일 것이고, 관리로 아름다워진 외모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연기일 것이고, 노래일 것이고, 춤일 것이고, 그림일 것이고……. 그토록 많고 많은 표현 수단 중에서 나는 글쓰기를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지만, 익숙하기도 했다. 외모를 가꾸기엔 시간이 없었고(물론 가진 바탕도 여의치 않았고), 연기와 노래, 춤, 그림에는 아예 소질이 없었다. 그나마 만만한 것이 글쓰기였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글쓰기가 내게 그림이나 연기, 노래, 춤만큼이나 막막하고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시작조차 못 하고 수업 시간을 그냥 보내는 아이들이 허다했다.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볼멘소리부터 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대충 몇 문장 휘갈겨 쓴 다음 엎드려 자는 아이들도 숱했다. 막힘 없이 쓰는 아이들이 도리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쓰기를 처음 접하는 곳이 학교였다. 제대로 된 쓰기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평가는 꼭 했던 글쓰기 말이다.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 점수로 수치화되는 글쓰기.
우리에게 익숙한 글쓰기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말에, 심지어 책까지 냈다는 말에 ‘대단하다’는 평가가 따를 수밖에. 허나 글쓰기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도구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표현 방법은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용은 누구에게도 평가받을 수 없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님을, 평가받기 위한 글이 아님을, 내 글의 유일한 독자는 나임을 인지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잘 쓴 글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글쓰기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글로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드러내 보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역시나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것은 ‘일기’ 쓰기이다. 일기조차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기 위해 쓴 경험이 전부인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출발일 것이다. 하지만 일기 쓰기는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쓰기이며, 글쓰기의 본질에 가장 닿아 있는 것이다.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고 마음을 되새겨보는 일, 그로써 일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일. 나를 알아가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과 겪은 감정을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일기를 꽤 오래 써왔다. 이십 대 후반 취업을 하고 집에서 독립해 원룸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처음 하는 일은 자주 힘에 부쳤고, 뜻대로 되지도 않았다. 혼자 맞는 밤은 자유롭기보다 두려웠고, 종종 외로웠다. 이십 대 후반이면 결혼 적령기라는 데 1년째 이어지던 연애는 지지부진했다.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싱글 침대에 엎드려 두서없이 한두 문장 쓰기 시작한 것이 일기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은 쓰고 어느 날은 건너뛰고, 어느 날을 길게 쓰고 어느 날은 한 단어로 끝맺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따라 밤이 깊어가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을 읽자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귀찮았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지루했다. (그때만 해도 유튜브가 이만큼 활성화된 때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머리맡에 놓인 일기장을 펼쳤고 별생각 없이 처음부터 그날 쓴 곳까지 차분히 읽어보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쓰고 덮어두었을 뿐, 책 읽듯 정독해서 읽어본 것은.
기분이 묘했다. 짧은 메모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를 스쳐 간 일들과 당시의 내 마음이 떠오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힘들었던 일들도 설렜던 일들도 다 지나갔구나’, ‘그때 느꼈던 절절한 마음도 돌이켜보니 새삼스럽구나.’ 일기를 조금 더 제대로 써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처음으로 내가 내 일기장(글)의 독자가 되어본 그때.
그 뒤로는 가능하면 건너뛰지 않고 일기를 썼다. 작은 노트(A4 절반쯤 되는)였지만, 어떤 내용이든 한 페이지는 써보기로 했다. 어떤 날은 도저히 쓸 게 없어서 책을 필사하기도 하고 휴대전화를 뒤져 좋은 문장을 그대로 옮겨 쓰기도 했다. 어떤 날은 그날 하루 있었던 일만 썼는 데도 한 페이지가 가득 찼고, 어떤 날은 마구 휘갈긴 감정만으로도 가득 찼다. 어느 정도 일기장의 페이지가 넘어가고 나면 처음부터 일기를 읽어보았다. 나만 아닌 비밀스러운 의식처럼.
그렇게 조금씩 써나간 일기가 5년쯤 되었을 때, 아이를 가졌고 나의 일기는 태교 일기로 다시 육아일기로 넘어갔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입덧에 육아에 복직까지 겹쳐 일 년쯤 일기 쓰기가 중단되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나를 돌아보고 드러낼 방법이 없었던 그때가. 둘째가 십 개월쯤 되었을 때부터 다시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육아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살아있는 일기장
지금 나는 더 이상 매일의 일기에 목숨 걸지 않는다. 매일 일기를 쓰지 않더라도 무언가는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만나면 익숙한 일기를 쓰기도 하고, 좋은 책을 읽으면 감상문을 쓰기도 한다. 번뜩이는 소재가 떠오르면 에세이를 쓰기도 하고, 순간을 포착해서 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글쓰기가 오래전부터 이어온 ‘일기 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나의 글들은 복잡한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어 쓰기 시작했던 짧은 일기들이 일궈낸, 귀한 열매라는 것을. 내가 나를 잃어버린 채 헤매고 있던 그때, 마구 쓰고 일단 썼던 그 모든 순간들이 하고 많은 길들 중 글쓰기의 길로 나를 인도했다는 것을.
그러니 당신도 쓰기를 시작해보시기를.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점수를 받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글쓰기를.
대단한 문장이 아니라도 좋으니, 참신한 표현이 아니라도 좋으니.
일단 쓰고 마구 쓰고 꾸준히 써보시기를.
어느 날 문득,
앞선 페이지를 들춰보며 당신의 글에 유일한 독자가 되어, 스스로의 삶을 응원하고 마음을 인정하는 자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나를 깨운 것은 글쓰기였다."
자판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재어본다. 글쓰기. 지금까지의 삶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내 인생의 일등공신이다. '나답게'를 고민하게 했고,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계속 글을 써오는 동안, 훨씬 강해지고, 한층 담대해졌다. 그래서일까. 입에 붙는 말이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뚫립니다. 계속 쓰다 보면 만나게 됩니다. 계속 쓰다 보면 알게 됩니다.
-윤슬, <글쓰기가 필요한 시간>(28쪽)
브런치 작가 3명 (선량, 읽는인간 ,진아)이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한 번쯤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세 사람의 이야기누 각각의 물길을 타고 흐르지만, 결국은 글쓰기의 바다에서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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