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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19. 2020

거꾸로 입어도 괜찮아

너의 처음을 언제나 응원해♡

어떤 평범한 말 앞에도 '처음'이라는 의미의 '첫-'이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모두 특별한 말이 된다. '첫사랑, 첫니, 첫차, 첫발, 첫날...'

두 번째부터는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이, 처음이라것만으로 특별한 일이 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처음'의 특별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여러 번 처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아이가 보여주는 '처음'은 곧 성장이라 그 순간순간이 말로는 이루 다 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때론 경이롭기까지 하다.





오늘따라 사랑이는 아무리 재우려고 해도 낮잠 자기를 거부하고 놀더니 네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쏟아지는지 잠투정이 섞인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낮잠을 안 자고는 버티지를 못하는 아이가 낮잠을 건너뛰었으니 얼마나 졸릴까 싶으면서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로 소리를 지르고 울기 시작하니 나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달래도 보고, 잠이 와서 그러냐고 안아주어 보아도 울음과 소리지르기는 그칠 기미가 없고 오히려 그 강도가 점점 더 세졌다.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다 나와서부터 짜증을 내기 시작한 거라 옷도 입지 않고 애착 이불만 감고 앉아서는 짜증을 부리는데, 어떻게든 달래서 옷이라도 입혀 보려 해도 안 입을 거라며 울기만 했다. 계속 같이 있다가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사랑아, 너 지금 너무 울고 소리 질러서 엄마는 너랑 대화를 못하겠다. 일단 울음부터 그쳐. 엄마 기다릴게."


라고 말하고는 나는 내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버렸다. 사랑이는 한동안 진정될 기미 없이 계속 짜증을 부리더니, 소리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모르는 척 집 정리를 하다가 무심하게, 입을 옷을 아이 앞에 툭 내려놓으며 "입어"라고 말하고는 계속 내 할 일을 다. 사랑이는 한동안 옷을 본체만체 하며 혼잣말을 하며 놀더니 어느 순간 앞에 놓인 옷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사랑이는 한 번도 윗옷을 혼자 입어본 적이 없었다. 팬티와 바지는 혼자서도 입는데, 소근육 발달이 늦은 데다 성격도 급해서 윗옷 입는 것을 어려워했다. 또 자기가 잘 못하는 것은 안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서 윗옷은 무조건 못 입으니 엄마가 입혀달라고 매번 성화였다.

그래서 모르는 척 옷을 건네줬어도 윗옷까지 다 입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팬티와 바지를 입고는 나를 기다리거나 못 이기는 척 나에게 들고 와서 입혀달라고 하면 입혀주면서 아까 왜 그렇게 짜증이 났었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역시나 팬티와 바지를 먼저 입더니, 웬일인지 한 번도 혼자서 펼쳐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윗옷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소파에서 빨래를 개며 모르는 척 곁눈질로만 사랑이를 보고 있었다. 사랑이는 윗옷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더니 목에다 쓱 끼웠다. 속으로 '대박, 대박'을 외치며 '사랑아, 할 수 있어. 파이팅. 힘내라. 소매 저기 있네!!!'  들리지도 않을 응원을 있는 힘껏 보냈다. 아이는 끝내 혼자서 한쪽 소매에 팔을 끼우고, 이리저리 낑낑대더니 다른 쪽 소매에도 팔을 끼워 윗옷 입기에 성공했다. 본인도 뿌듯했는지 좀 전에 그렇게 짜증을 부린 것은 완전히 잊고는 "엄마, 나 혼자 옷 입었어!"라며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힘껏 안고는 "우리 사랑이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라며 뽀뽀를 퍼부었다. 아이는 으쓱하며 내 품에서 스르륵 벗어나 아빠에게도 자랑한다며 돌아서서 가는데, 이런! 옷을 거꾸로 입었다. 하지만 나는 옷을 바로 입혀주지 않았다. 거꾸로라도 괜찮으니까. 아이가 혼자서 처음 윗옷을 입은 그 기쁨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옷 좀 거꾸로 입으면 어떤가,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는 걸!


거꾸로 입어도 괜찮아


그렇게 사랑이는 오후 내내 윗옷을 거꾸로 입고 놀았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나는 그걸 볼 때마다 또다시 감격했다.


"사랑아, 오늘 우리 사랑이가 혼자서 옷 입었지? 정말 멋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아이를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잠들기 전 긴팔 옷으로 갈아입는데 다시 한번 혼자 입어보라고 했더니 사랑이는 이내 다시 아기 모드가 되어서는 "엄마가 입혀줘, 입혀줘야지" 하며 다리에 매달렸다. 결국 팬티와 바지는 혼자 입고, 윗옷은 내가 목에 끼워주기만 하고 소매는 혼자 찾아서 팔을 끼워 입었다. 어설프긴 해도 조금씩 혼자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회를 주는 것이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테니.





아이가 처음 혼자 무언가를 해냈던 순간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혼자 걸었던 날,

혼자 신발을 신었던 날,

혼자 물컵에 물을 마시던 날,

기저귀를 떼고 혼자서 소변기에 소변을 봤던 날, 혼자 지퍼를 열어 겉옷을 벗었던 날,

혼자 팬티와 바지를 입었던 날,

혼자 숟가락질을 해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던 날, 혼자 현관문을 열었던 날,

혼자 블록을 높이 쌓았던 날,

혼자 책을 보던 날,

혼자 낮잠에 들었던 날,


그 수많은 '첫 해냄'의 순간들이 모두 다 떠오른다. '혼자'라는 외로운 단어가 '처음'과 만나니 외로움 대신 기쁨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이는 앞으로도 수많은 일들을 혼자 해내며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날 것이다.


어른에게아무것도 아닌 일이 너무도 어려운 아이가, 당연한 듯 그 일을 해낼 때까지,  성장의 고비마다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순간을 열렬히 응원해주며, 성장의 기쁨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요즘 들어 무엇이든 오빠를 따라서 혼자 해보려고 애쓰는 우리 둘째 봄이, 그 어설픈 도전에도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

봄아, 언젠가는 너도 엄마 도움 없이 혼자 옷도 입고, 손도 씻고, 간식도 꺼내먹는 4살 어린이가 될 테니 조금만 천천히 가자. 겨우 15개월인 네가 자꾸만 뭐든 혼자 하려고 하다가 다치니까 엄마가 속상해. 알았지?


그러고 보니 혼자 하려 해도 걱정, 혼자 안 하려 해도 걱정이다. 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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