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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20. 2020

영유아 검진이 뭐길래.

비교하지 말 것. 불행한 길을 자초해서 가지 말 것.

사랑이의 네 번째 영유아 검진을 하고 왔다. 코로나 여파로 미룰 대로 미루다가 산책을 나간 김에 다니던 소아과에 들러 영유아 검진을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다고 해서 급하게 하게 되었다. 보통은 미리 문진표를 받아 와 집에서 이것저것 꼼꼼히 체크하는데 이번 검진은 갑자기 하게 된 바람에 병원 한쪽 구석에 앉아 문진표를 작성해야 했다.     


내가 문진표를 작성하는 동안 사랑이는 아빠의 도움을 받아 키와 몸무게를 재고 간호사 선생님이 가져온 줄자로 머리둘레도 쟀다.      


"사랑이 드디어 14킬로 넘었다."

"진짜? 어린이집 안 가고 집에서 종일 먹더니 드디어 14킬로를 돌파했구나!"

"근데 키가 91.9다. 작은 거지?"

"몰라, 위에 표랑 비교해봐."

"평균이 96.5네. 작긴 작다."

"그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랑이는 지난 1년 내내 12킬로~13킬로를 유지하며, 아무리 잘 먹이려 애써도 더 이상의 몸무게 증가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애타는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살이 안 찌는 만큼 키도 안 자라서 걱정이었는데, 요즘 들어 좀 큰 것 같아 살짝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그건 그냥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었던가 보다.


문진표 항목이 꽤 많았다. 영유아 검진 때마다 문진표를 받아 들면, ‘지금 개월 수 아이들이 이런 것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은 것들이 많았다. 지난 세 번의 검진에서 문진표를 작성할 때는 대체로 ‘잘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있는 편이다’에 체크를 할 수 있었다. 그때의 뿌듯함이란!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느낌, 제대로 발달하고 있다는 느낌에 더불어 뒤처지지 않는다는 느낌은, 더 솔직히 말하면 앞서 나가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문진표의 결과는 꼭 엄마 성적표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가 항목에 있는 것들을 가뿐히 해낼 수 있을 때, 그것이 오롯이 아이의 발달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를 잘 키워내고 있는 듯한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모든 항목에 “잘할 수 있다”를 체크하면, 그 문진표의 결과가 마치 엄마 성적표가 All A+인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대근육 발달이 빠른 사랑이는 대근육 운동 영역의 문진 항목은 모두 "잘할 수 있다"에 체크를 할 수 있었다. 언어나, 사회성 영역도 그랬다. 그런데 소근육 운동 영역에 들어서자 멈칫하게 되는 항목이 너무 많았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는 항목들도 많아서 즉석에서 이면지를 받아서 해봐야 했다.     


"사랑아, 이것처럼 그릴 수 있어?"(원 모양을 시범 안 보고 그리기)

"응!"     

시원한 대답만큼 아름답게 성공하진 못했으나 대충 동그라미 비슷하게 그려서 '할 수 있는 편이다 '에 체크.     

"이건?"(네모 모양을 각을 살려서 그리기)

"할 수 있지!"     

결과는 대 실패.. 아예 네모 근처에도 못 갔다. 찌그러진 동그라미에도 못 미쳤다. '전혀 할 수 없다'에 체크.

그렇게 십(+) 자 모양 그리기도 실패, 점선 따라 선 그리기 실패.  모두 '전혀 할 수 없다.'     


다음 영역은 인지 영역, 인지 영역에서 딱 걸린 항목은 사람을 그리면 신체의 세 부분 이상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랑아, 엄마 한 번 그려볼래?"

집중하는 눈이었지만 종이에는 삐뚤빼뚤 선만 그어졌다.

"아니 아니, 엄마 얼굴 그려봐."

"이거 엄마 얼굴이야."     

애벌레 한 마리가 기어 다녔다. 분명히 얼굴도 알고 눈코입 어디에 있는지 다 아는 사랑이가 왜 그렇게 그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재차 시도해보라고 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애벌레 서너 마리만 더 그려질 뿐이었다. 그 항목이 인지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는 것과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매우 큰 모양이었다. 결국 "전혀 할 수 없다"에 체크.     


마지막 자조 영역은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는가에 대한 항목들이었다. 혼자 옷을 입는 것, 양말을 신는 것, 밥을 먹는 것 등 사랑이가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하려고 노력 중인 것들이어서 '할 수 있는 편이다'에 체크를 했다.




간호사 선생님에 문진표를 주고 조금 기다렸다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간단히 진찰을 하고 난 뒤 말했다.


"키랑 몸무게가 10, 27로 많이 작네요. "

(10, 27이라는 숫자는 100명 중 작은 순서대로 줄은 세웠을 때, 현재 아이의 위치다. 그러니 숫자가 작을수록 작다는 말이다.)

"아, 네."

‘작긴 했어도 40 정도는 유지했었는데, 10이라니...’

"생우유는 200ml로는 부족하고 하루 400~500ml는 먹어야 됩니다. 안 되면 치즈 같은 다른 유제품이라도 먹이세요."

"네, 우유는 싫어해서 치즈로 먹이고 있어요."

"다른 발달상에는 특별히 문제가 없습니다."

"아, 네."     


영유아 검진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사랑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고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는 건데,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데도 뭔가 뒷맛이 씁쓸했다. 의사 선생님은 별말이 없었지만 문진표를 작성하면서 느꼈던 걱정과 좌절감에다가, 생각보다 더 작은 사랑이의 키와 몸무게가 꼭 엄마인 내가 제대로 먹이지 않아서 생긴 결과처 느껴져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꼭 F가 왕창 뜬 엄마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었다.          

 

‘100명 중에 키가 10등, 몸무게는 27등이라니... 이렇게 안 커서 어떻게 하지? 소근육 발달을 보니 문제가 심각해. 보통 다른 애들은 이런 걸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사랑이만 못한다고?’     


집에 오는 내내 괜히 조바심이 났다. 당장 저녁부터 뭘 더 해먹여야 할지, 오늘 못 그린 네모를 그리는 연습을 해봐야 하는 건 아닐지, 엄마 얼굴 그리기부터 해봐야 하는 건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집까지 걸어오는 5분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랑이를 씻기면서도 계속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키운다고 키웠는데 아이는 왜 이렇게 작으며, 치우기 힘들 것을 각오하고도 클레이 만들기, 물감놀이, 종이 오리고 붙이기 등을 시도 때도 없이 했는데 왜 소근육 발달은 더딜까 싶었다. 아무래도 오늘부터는 놀이를 하더라도 미술놀이를 빙자한 도형 그리기 놀이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랑이를 데리고 욕실에서 나왔다.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으라고 내어줬더니, 사랑이는 로션 한 통을 다 쓸 기세로 쭉쭉 짜서는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고는 “엄마, 이봐”라며 깔깔깔 넘어가며 웃었다. 그리고는 “못해, 못하겠어” 징징거리며 엄살을 부리더니 혼자서 옷을 입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엄마”라며 목을 끌어안고는 “엄마, 사랑해”라며 애교를 부렸다.     


방금 씻은 아이에게서 나는 엷은 바디클렌저 향기와 매끈한 볼의 감촉, 애교 섞인 목소리까지. 별안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깟 숫자 몇 개에 내가 뭘 조바심 내고 불안해했던 거지?’          




아이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자란다. 모두 한 틀 안에서 자랄 수는 없다. 문진표에 나와있는 항목들은 그저 통계적인 것일 뿐이다. 그 시기를 넘겨서 할 수도, 그 시기가 되기도 전에 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심각하게 늦다면 발달지연을 의심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때가 되면 다 해낸다. 아이를 키워보니 그랬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또 실수를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내 아이가 작다는 사실에, 다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내 아이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하고 조바심을 냈다. 내 아이의 성장곡선이 아닌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절대 비교만은 하지 말고 키우자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짐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남과 비교하며 제 속도대로 잘 자라고 있는 아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고작 영유아 검진에서도 이런데, 나중에 아이가 학교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는 얼마나 수많은 비교 대상들이 생길 것이며 그로 인해 나도 아이들도 불행한 길에 들어설 위기가 얼마나 많을까. 내가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도, 세상은 아이들을 자꾸만 비교의 길 위에 세울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두 아이는 끊임없이 비교와 경쟁의 직선으로 내몰리겠지. 그때마다 그 직선에서 조금 비켜서도 괜찮다고, 꼬불꼬불 돌아가는 길로 가도 괜찮고, 옆길로 새도 괜찮고, 힘들면 그냥 주저앉아 쉬었다가 다른 길을 찾아봐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든든한 엄마가 되고 싶다. 제 속도, 방식, 기준대로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엄마이고 싶다.     


비교 금지! 이렇게나 예쁜 걸.

이렇게 매일 다짐만 쌓여간다. 중요한 건 실천인데 말이다.               




* 영유아 검진을 처음 준비하는 초보 엄마 아빠께 드리는 팁

영유아 검진은 대부분의 소아과에서 실시하고, 간혹 내과나 이비인후과에서도 하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때나 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대부분의 소아과에서는 영유아 검진을 하는 요일과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미리 알아보고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또 영유아 검진은 의사 선생님의 스타일에 따라서 피드백의 양과 질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문진 항목의 영역에 대해서 꼼꼼히 설명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부모가 작성한 문진 항목을 입력하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은 해주시지 않는 분도 세요. 그래서 꼼꼼히 설명해주시는 의사 선생님이 계신 소아과는 두세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영유아 검진을 아주 체계적으로 하는 병원도 따로 있다고 해요. 그런 병원에서는 마치 발달 센터에서 하듯이 아이를 실제로 몇 분간 놀게 하면서 그 모습을 꼼꼼히 관찰한 뒤 피드백을 해주고, 식단 및 영양 관련 상담을 따로 해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곳으로 예약을 잡아서 가면 아이의 성장 정도를 보다 꼼꼼히 체크할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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