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저는 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시험을 치고 있더군요. 옆자리 친구는 끙끙거리며 괴로운 신음을 내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저는 이미 시험을 다 풀고 여유만만한 표정이었어요. 그때 옆자리 친구랑 눈이 마주쳤는데, 그 친구 표정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같은 표정이었어요. 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룰루랄라 여유를 부리고 있었고요.
선생님이 “이제 5분 남았다”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다 치른 시험지를 후루룩 넘겨봤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죠. 영어 시험지가 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분명 저는 다른 과목(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시험지를 다 푼 후였거든요. 왜 영어 시험지가 여기서 나오지, 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곗바늘 소리가 들렸어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문제만 있고 답은 표시되지 않은 시험지가 몇 장 더 있는 거예요. 식은땀이 나려던 찰나, 꿈속의 제가 의외의 행동을 하더라고요.
펜을 툭 꺼내더니 1번부터 끝번까지 쭉 답을 찍어버리더군요. 뭐 어쩔 수 없다는 듯이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의식 상태였으니, 꿈속의 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굉장히 낯설었어요. ‘이게 뭐지?’하는 마음과 함께 엄청 통쾌하더라고요. 꿈속의 저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죠.
깨어보니 꿈이었어요. 시험이 끝나기 5분 전에 발견한 백지의 시험지. 저에게는 엄청난 악몽이 틀림없었어요. 예전의 저였다면, 아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은 웃음이 터졌어요. ‘와, 그동안 진아 너 많이 컸다!’ 싶더라고요.
중학교 시험 시간에 진짜 백지 시험지를 받아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실제로 그 시험지는 백지가 아니었어요. 버젓이 문제가 다 적혀 있었는데, 제 눈에만 그게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아마 시험 준비가 너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시험지를 받아 들었는데, 시험지가 흐릿하게 보이면서 백지처럼 보이는 거예요. 저는 시험지가 백지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문제가 쓰여있다고 하셨어요. 저는 울었고 당황하신 선생님은 저를 결국 양호실로 데려다주셨던 것 같아요.
그때, 시험을 결국 치르지 못했을 거예요. 그 뒤 어떻게 성적 처리가 되었는지, 담임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병원은 갔는지, 어떻게 해서 괜찮아졌는지는 기억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 이후로도 저는 시험 때만 되면 배가 아팠고, 머리가 아팠고, 과호흡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픽 쓰러져 버리기도 했어요. 그만큼 저에게 ‘시험’은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머리가 대단히 좋지도 않았으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자 언니이자 조카는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험기간에만 바짝 벼락치기를 해서 시험을 쳤죠. 긴장감과 부담감은 높은데, 준비는 부족하니 매번 몸에 이상반응들이 나타났던 거예요.
우연한 계기(이 계기도 언젠가는 글로 써보겠습니다)로 죽을힘을 다해 공부를 해보게 되었어요. 감사하게도 노력의 결과가 좋았고, 그 한 번의 경험이 계속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노력하는 일이 두렵지 않아졌어요. 노력이 두렵지 않은 만큼 열심히 했고, 다행히 결과도 늘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럼에도 제 내부에는 시험이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던 건지, 아니면 어떤 불안과 긴장이 ‘시험’이라는 도구로 표현되는 건지. 스트레스를 받거나 걱정이 많을 때면 꼭 시험을 보는 꿈을 꾸더라고요.
참 오랜만에 시험을 보는 꿈을 꿨어요. 심지어 종료 5분 전에 백지 시험지를 발견한 꿈을요. 아마도 내일이면 출근을 해야 하고,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보내야 한다는 게 적잖은 긴장을 불러일으킨 것이겠죠. 그런데 제가 울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어쩔 수 없지!’하면서 답지에 마킹을 했어요. 물론 다 찍은 거지만, 보나 마나 결과는 처참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에너지 빼지 말자는 표정으로 시원하게 답을 찍어가는 저를 보니 너무 기쁘더라고요.
어쩌면 진작 그랬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더 이상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부정적인 결과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는지도요. 그걸 못하고 끙끙거리느라 몸도 마음도 괴로웠던 날들이 꽤 길었다 싶네요.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오늘 새벽의 꿈이, 앞으로의 제 삶에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너무 목숨 걸지 말자.
애쓸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되는대로 저질러버리자.
돌이킬 수 없는 일에 걱정하고 매달리지 말자.
어쩌면 이미 그런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제가 눈치채지 못하니 꿈이 알려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