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1만 시간쯤 꾸준하게 어떤 일을 하고 나면 그 일에서는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법칙의 전제는 두 가지입니다. ‘일만 시간’이라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과 ‘꾸준히’라는 지치지 않는 성실함이지요.
하루에 세 시간씩, 십 년쯤 모이면 일만 시간을 채울 수 있다고 해요. 하루에 세 시간씩 십 년을 꾸준히 한다면 최소한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참 안 통하는 일이 있어요. 제 경험에 따르면 ‘수업’이 그렇습니다.
저는 올해로 12년 차 교사입니다. 하지만 육아 휴직을 4년 6개월이나 하는 바람에 실제 경력은 7년이 조금 넘었어요. 그래도 발령 초기부터 하루에 수업을 서너 시간씩 했으니 이제 곧 일만 시간에 도달할 겁니다. 사실 수업 준비를 위해 투자한 시간을 합친다면 일만 시간은 진작 넘었을 거예요. 그런데 수업은 일만 시간의 법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수업을 하는 모습’ 일 겁니다. 교사라는 말 자체가 ‘가르치는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교사들에게도 가장 익숙한 일이 ‘수업’ 임은 부정할 수 없어요. 행정 업무는 매년 달라지더라도, ‘수업을 한다’는 사실은 교사로 사는 동안 결코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 수업이, 참 어렵습니다. 해도 해도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년 새롭고 낯섭니다. 교과 내용이 낯설지는 않아요. 교육과정이 달라지고 교과서가 자주 바뀐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교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수년을 거듭하는 수업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학생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매년 다른 아이들을 만납니다. 한 해에만 수백 명의 다른 아이들을 ‘수업’이라는 장면에서 만나요. 올해 제가 만나는 아이들만 해도 이백 명쯤 됩니다. 모두 다른 이백 명의 아이들을 ‘국어수업’이라는 한 장면에서 만나다 보니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할지 매번 고민스럽습니다. 내년이 되면 이 아이들과는 헤어지고 또 전혀 새로운 이백여 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이렇게 저와 호흡을 맞추어야 할 아이들은 매년, 매 수업마다 달라지니 어떻게 수업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반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해마다 분위기가 달라요. 저와 다른 세대를 살아온 아이들이고, 저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저와 다른 추억을 가진 아이들이고, 저와 다른 아픔을 지닌 아이들이에요. 물론, 저는 국어 교과 내용을 그저 제가 아는 대로 가르치면 그만이긴 합니다. 사실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 하는 국어 수업이 뭐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그럼에도 저는 늘 어렵습니다. 수업에 들어갔을 때, 매 시간 엎드린 채로 저를 맞이하는 아이를 보는 마음이 어렵고, 모둠 활동에 섞이지 못하고 한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를 보는 마음이 슬퍼요. 제가 구성한 활동이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배움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힘들고, 실제 수업에서 아이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해 수업이 산으로 갈 때 끝없이 무기력해집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수업이, 매번 새롭게 어려운 수업이 아직까지는 참 좋습니다. 감사하게도 국어교사라 교과 내용을 핑계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아이들의 글을 읽어볼 수 있으며, 아이들과 문학을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아요. 그래서 타협이 되지 않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굳이 어려운 길을 찾게 됩니다. 한 명이라도 더 배움의 길로 이끌고 싶어요. 아니, 배움까지는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국어수업에서만큼은 소외되고 배제되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의 꿈이, (경력 10년이 채 되지 않는) 젊은 교사의 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황한 소리라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건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몇 년 후의 제가 지금의 저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그런 마음이 찾아왔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써두는, 보험증서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다음 주 수업을 떠올립니다. 다음 주에 아이들과 함께 할 활동을 구상하고, 수업 시간마다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몇몇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다음 주에는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활동들로 배움 있는 수업을 할 수 있을까요? 수업에서 소외되었던 아이들을 수업 장면 속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