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지막 금요일, 중간고사 전부터도 아이들을 들뜨게 했던 체육대회가 열렸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학사일정이 축소 혹은 폐지되면서 체육대회나 현장체험학습(과거의 소풍), 졸업여행과 수학여행 등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니 무려 3년 만에 열리는 체육대회였던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고1 아이들은 체육대회의 기억이 중1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하여, 초등학생의 테를 채 벗지 못한 때에 경험한 체육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체육대회의 꽃은 개성 있는 반티를 맞춰 입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중1 때의 체육대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조정안이 속속 발표되고, 일상으로의 회복이 가속화되면서 예정되어 있던 체육대회가 취소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기자 아이들은 슬슬 들뜨기 시작했다. 5월 첫 주에 중간고사가 있었지만 그때부터도 아이들은 반티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담임 선생님들은 속이 터지셨을지도.^^;;) 담임이 아닌 나는 한 걸음 뒤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이라,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이들의 설렘이 그저 싱그럽게 느껴졌다.
반티라는 게 말 그대로 ‘우리 반’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지라 다른 반과 겹치지 않도록 정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반티를 입으려면 다른 학년, 다른 반에서 반티를 정하기 전에 재빨리 주문서를 넣어야 한다. 그러나 반 안에서 의견 일치를 보는 게 쉽지가 않다.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스물대여섯 명이, 그것도 남녀가 섞여 있는 데다가, 심지어 자기주장 강한 사춘기 아이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빨리 주문서를 넣은 반의 경우에는 마음이 잘 맞았거나 단합이 잘되었을 수도 있지만, 소수의 희생과 양보 혹은 몇몇 목소리 큰 아이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확률도 높다.
중간고사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반티 선점 전쟁이 시작되었다. 반 안에서 의견 일치가 안 되어서 5월 내내 냉기가 철철 흐르는 반도 있었고, 같은 디자인을 선택하고는 ‘우리가 먼저 정했네.’, ‘우리가 먼저 주문했네.’로 싸움 직전까지 간 반들도 있었으며, 날짜가 임박해오는 데 반티 배송이 되지 않아 오매불망 택배만 기다리는 반도 있었다. 딱 하루, 그것도 반나절 정도 입는 옷을 위해서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처절할 정도로 깊이 고민하는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차는 어른들도 있을 거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5년 만에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일상복이 무채색에 국한되어 있음을 느꼈다. 1학년이라 생활복(교복)을 하복부터 입는 바람에 3,4월 동안은 아이들의 사복을 엿보게 되었는데, 하나같이 검정, 회색, 혹은 아주 짙은 남색(검은색과 거의 구분 불가), 흰색이었다. 그나마도 청바지를 입고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색감이 있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무채색의 향연이었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그 색깔들을 무척 좋아해서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필기구를 보면 분홍에 주황에, 노랑에, 빨강에, 온갖 유채색이 다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옷만은 무채색을 고집하는 건, 교실 안에서 나만 노란색 옷을 입을 수는 없다는 생각, 나만 연분홍을 입을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그건 너무 튀는 일이니까. 그렇게 튀어서 주목받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묻어가고 싶으니까. 나만 별난 아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섞이는 아이로 보이고 싶으니까. 물론 이건 전부 경험에 비추어 본, 내 추측이다. (그냥 유채색의 옷이 예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유채색 옷을 입었던 것 같다. 그제야 내가 집단 속의 한 명을 벗어나 개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걸지도.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모든 반 아이들이 반티를 맞춰 입었다. 무채색의 향연이던 학교에 분홍, 빨강, 파랑, 붉으락푸르락 봄이 피었다. 날씨마저 좋아, 푸른 하늘 아래에서 아이들은 정말 오랜만에 웃고 소리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달리고 뛰어넘었다. 그런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데 왜 울컥하는 건지.
‘저 아이들 살아있다!’
순간 느낀 감정은 ‘생동감’이었다. 팔딱팔딱 뛰는 아이들의 심장 소리가 운동장 전체를 가득 채운 듯한 느낌. 처음 보는 체육대회도 아니었는데, 그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었다. 맨날 엎드려 잠만 자던 녀석이 이어달리기 선수로 서 있는 걸 보고 확신했다. 이 느낌은 정말 ‘살아있는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거기서 기인한다고.
겨우 반나절, 네다섯 시간 남짓한 행사였지만 아마 아이들에게도 ‘학교 오는 즐거움’을 만끽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일이면 그날의 기억은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다시 일상이 되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기억 속에 2022년 늦봄과 초여름 사이 단 하루의 시간이, 따사롭고 열정 넘치던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본다.